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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프라하의 아침

소설 연재

by 태섭
그는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라테 한 모금을 들이켰다. 고소한 향기와 대비되는 씁쓸한 맛. 음 역시 150년의 전통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커피 장인이 손가락이라도 한 번 넣었다가 빼을까나? 항상 짭짤-달달-오묘한 손맛이 느껴졌다. 굳이 예전 응급실에서 먹던 커피와 비교하자면, 가격은 저가커피의 2배인 5천 원인데 맛은 그것에 딱 150배였다. 밤샘 근무 때는 그것도 유일한 버팀목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햇살 아래 앉아 라테를 마시고 있다. 한때 꿈조차 꾸지 못했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하주는 요즘 체코 프라하에서 지내는 중이다. 카를교가 잘 보이는 곳에 숙소를 잡았다. 그는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고 생각했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한 달이 지났기 때문이다. 시간 개념을 까먹은 이유가 있었다. 하루 종일 동유럽의 아늑한 분위기를 만끽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가 태어난 후 3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러한 여유는 인생 처음이었다. 심지어 알람도 맞추지 않는 삶이라니.


오늘도 창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햇살에 눈을 떴다. 옆에는 윤슬이 코를 새근새근 골면서 자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깨우기라도 했다간, 꽤 아픈 이빨 자국이 팔에 남을지도 모른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1층에 있는 150년 된 카페에 가기 위함이었다. 그는 서둘러 노트북이랑 폰을 챙겨서 혼자 밖으로 나갔다.


"Dobré ráno (도브레 라노, 아침인사)"


카페 사장님은 평소 자주 오는 하주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늘 하루는 잘 잤는지, 책 쓰는데 아이디어가 잘 떠오를 것 같은지 물었다. 하주는 '너무 꿀잠을 자서 꿈을 못 꿨다'며, '꿈꾸지 않으면 상상의 나라로 가기가 쉽지 않다. 각성을 위해 당신의 카페인이 아주 매우 너무 필요하다.'라고 답했다. 한국에서라면 인사도 없이 들어와 적당히 조용한 공간에 얼른 앉았겠지만, 이곳에서는 자꾸만 말이 많아졌다. 그가 한 달 만에 "Děkuji (데쿠이, 감사합니다)", "S prominutím (스 프로미누팀, 실례합니다)"와 같은 간단한 체코어뿐만 아니라 영어 실력도 제법 늘게 된 이유였다.


하주가 카페의 첫 손님이었다. 묘하게 기분 좋았다. 사장님은 야외 테이블을 밖으로 꺼내고 있었다. 노트북을 잠깐 내려 뒀다. 그는 옆으로 가서 빨리빨리 사장님을 도와드렸다. 그래야 가장 좋아하는 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여유로운 프라하의 공기 속에서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케케묵은 습관이었다. 하주가 야외테이블로 나갔다. 왼쪽 가장 구석진 자리. 거기가 다른 테이블이랑 그나마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자 있기에 가장 편안했다. 게다가 뜨거운 아침 햇살도 피할 수 있었다.


가끔은 한국에 돌아가고 싶단 충동이 일었지만, 어디서도 접하지 못한 맑은 공기와 향기가 그 모든 불편을 없앴다. 프라하는 특유의 맑고 선명한 햇살이 있다. 아주 예민한 미세먼지 어플도 그곳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날 맘껏 숨 쉬라고 했다. 공기가 맑으니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기분까지 좋으니 눈빛은 매일 초롱거렸다. 햇살이 심하면 노트북 밝기를 최대로 올려도 잘 안 보였다. 여기는 프라하에서도 가장 빛이 선명하게 내려쬐는 장소. 보통 한국에서는 정남향을 좋아했는데, 체코에서는 정동향을 좋아하나 보다. 하주는 카페 주인을 슬쩍 쳐다봤다.


'아마도 이 햇살 덕분에 150년 전통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주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사장님이 다가왔다. 그는 고민도 없이 따라(따뜻한 라테)를 주문했다. 이 집은 라테가 제일 맛있었다. 하지만 이곳의 '아라'(아이스 라테)는 절대 시키면 안 된다. 분명 아이스라고 적혀 있지만 엄청나게 미지근했다. 얼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건 날이 아무리 뜨거워도 무조건 '따라'(따뜻한 라테)만 마시는 이유가 되었다.


그는 따가운 햇살을 맞으며 라테 한 모금을 들이켰다. 고소한 향기와 대비되는 씁쓸한 맛. 음 역시 150년의 전통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커피 장인이 손가락이라도 한 번 넣었다가 빼을까나? 항상 짭짤-달달-오묘한 손맛이 느껴졌다. 굳이 예전 응급실에서 먹던 커피와 비교하자면, 가격은 저가커피의 2배인 5천 원인데 맛은 그것에 딱 150배였다. 밤샘 근무 때는 그것도 유일한 버팀목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햇살 아래 앉아 라테를 마시고 있다. 한때 꿈조차 꾸지 못했던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 근데 이거... 혹시 데자뷔(Déjà Vu) 인가? 분명 어디에서 봤던 순간인데...'


하주는 잠깐 고민하더니, 이내 고된 밤근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암막커튼 속에서 꾸었던 꿈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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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병원 응급실 7년 차 간호사. 밤샘 근무와 번아웃 사이에서 읽고 쓰는 일로 제 마음을 붙들어 왔습니다. 제가 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도 작은 위안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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