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31
고등학교에서 수험 공부를 하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이 있다. 내가 내 정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알게 된다면, 나는 내 정신을 잘 다룰 수 있지 않을까? 물리학적인 지식으로 공학자들이 기계를 만들어내고, 생물학적인 지식으로 의사들이 병을 치료하듯이 말이다. 당시에는 문제 풀이를 더 잘하고 싶어서 했던 생각이지만, 수험 생활이 끝난 이후에도 이에 대한 호기심은 남아 있었다. 이제야 이를 해소해보려 한다.
인간의 정신을 탐구할 때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과학적으로, 임상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나는 이들 중 철학적 접근을 취하고자 했다.
정신과 관련 있는 철학의 분야들 - 심리철학, 인식론, 존재론, ... - 에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 철학자들이 있다. 철학자의 사상을 공부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그 철학자가 쓴 책을 읽는 것이고, 난 철학사에서 제법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분들의 책을 읽고자 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그간 내가 한 일들에 대해 기록하도록 하겠다.
0. 구상하기
내 일차적인 목표는 칸트의 사상을 이해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나는 근대 철학부터 훑으려 했다. 그런데 나는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어서, 내가 어떤 사상가를 다루어야 하며 책을 읽었을 때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하나의 이정표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 일환으로 『근대철학사: 데카르트에서 칸트까지』를 사서 참고했다. 그 책에는 칸트를 포함하여 7명의 철학자가 등장하고, 나는 그분들 하나하나의 책을 독파해 나가는 것을 세부 목표로 정했다.
1. 데카르트
『방법서설』과 『성찰』을 읽으려 했다. 『방법서설』은 '이성을 잘 인도하고 학문들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방법에 대한 서설'이고, 『성찰』은 인식의 원리들, 혹은 '제일철학에 대한 성찰'이다. 『성찰』이 『방법서설』에 비해 더 비일상적인 텍스트였고, 그래서 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해제가 자세해서 이를 적극 참고하며 완독해 낼 수 있었다.
2. 스피노자
『지성교정론』과 『에티카』를 읽으려 했다. 『지성교정론』은 스피노자의 인식론적 사상을, 『에티카』는 스피노자의 철학적 사상을 담은 책이다. 『지성교정론』은 완독할 수 있었지만, 『에티카』는 1부를 읽고 나서 이대로는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해하는 어려움을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A는 B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이때 A는 일상에서 쓰이지 않는 현학적인 단어인데, 스피노자는 이 문장을 A를 정의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후에 스피노자는 자신이 내린 정의를 이용해서 'B는 q한데 A는 B이므로 A는 q하다.'와 같은 증명을 하는데, 문제는 "그래서 어쩌라고?"의 생각만 든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증명 자체가 다 맞는 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알겠다.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 명제를 증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즉 저자의 의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스피노자의 에티카 입문』이라는 책을 대신 읽었다. 이 책에서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어떤 단어를 왜 이런 식으로 정의했고 어떤 연유로 작자가 이 정리를 증명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고, 비로소 의미를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 이 책 이후에 다시 한 번 『에티카』를 읽으려 했는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더라. 그래서 넘겨버렸다.
3. 라이프니츠
『형이상학 논고』와 『모나드론』을 읽으려 했다. 스피노자를 읽을 때와 비슷하게 이해력의 문제가 생겼다. 당시에 읽는 의욕이 떨어져서 그냥 포기했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이라는 책이 라이프니츠 철학의 입문용으로 언급되던데, 후에 읽을지는 모르겠다.
4. 로크, 버클리
라이프니츠의 저서를 읽을 때부터 열정이 식는 것이 느껴졌고, 한 사상가를 읽을 때에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는 것이 불안했다. 데카르트는 2주에 걸쳐 읽었으며, 스피노자의 경우 한 달이나 소요되었다. 이러다가 내가 정작 읽고 싶은 책은 다 읽지도 못하고 이 기간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그래서 건너뛰었다.
5. 흄
칸트는 흄의 환기가 자신의 교조적 선잠을 중단시켰다고 언급한 바 있다. 즉 칸트가 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했을 때, 내가 흄을 다루지 않고 곧바로 칸트로 넘어가서는 칸트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인간의 이해력에 대한 탐구』를 읽었다. 다행스럽게도 로크와 버클리의 사상을 모름에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이전에 읽었던 책들보다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쉬웠다. 글을 잘 쓰시는 것 같다.
6. 칸트
『순수이성비판』을 읽으려 했다. 첫 장부터 이해하기 힘들었다. 어찌저찌 머리말과 서론, '초월적 감성학' 장까지 대략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는데, '초월적 논리학' 장에 들어서고부터 한계를 느꼈다. 그래서 『형이상학 서설』을 먼저 읽기로 했다.
『형이상학 서설』은 『순수이성비판』이 출판된 이후 나처럼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예습으로서 저술한 책이다. 『순수이성비판』에 비해 신경을 써 주신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난해했다. 초반부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읽었던 부분과 중복되기도 해서 제법 괜찮았지만, 이를 넘어 칸트가 순수 이성에 대해 다루기 시작할 때부터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순수이성비판』과 서로 참고해가며 읽어야 할 듯하다.
기록하고 보니 뿌듯하기는 한데, 한 가지 걱정인 점은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는 데에 올해의 남은 날들을 다 써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철학 말고도 많은데. 빨리 다른 일들도 시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