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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알갱이 Jun 13. 2024

삶이라는 단죄

이겨내기 힘든

삶이라는 우연
살아있기에 어떠한 일이 생기고 이에 따른 반응 또한 자연스레 따라오지만 그 과정과 결과가 항상 유쾌할 수만은 없다. 여기서 나는 멈춰 서버리고 만다. 그러곤 오래도록 인과를 나열한다. 안이든 밖이든 원인이라 지목된 무언가에 분노하기도 좌절하기도 하며. 그럴수록 걸음 하나 떼기 어려울 정도의 무거움에 짓눌리고 호흡을 잃게 된다. 숨구멍조차 막혀버릴 것 같을 때 찾은 상담센터에선 삶의 많은 일들은 우연이라고 했다.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에서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선 어찌할 수 없는 것보다는 어찌할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두라고 했다. 그 문장을 들으며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의 삶과 과정, 선택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네.. 우리는 늘 인과를 따졌는데, 내 탓이든 남 탓이든 아니면 둘다를 탓하든. 낮과 밤처럼, 네 번의 계절처럼 그 흐름과 변화, 순환을 그저 살아내면 되는 거였는데.  


가족의 모양
대개 많은 사람들이 그리는 일반적인 가족의 외형이 존재한다. 그러나 개개의 모습을 보자면 그 모양과 내부, 구성은 이질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각기 다르다. 평균의 틀에서 벗어난 가정, 가족은 많은 이들의 입에 부정적인 담화로 오르내린다. 혈연이 아니거나 무언가 결핍되었거나 예기치 않은 붕괴를 겪었을 때 사람들은 그 가정과 가족 속 개인을 문제시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다. 이런 무례한 언사들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참으로 매섭고 아프다. 외부의 풍랑이 거세니 뿌리는 더 깊게 내린다. 우리 가족은 안팎의 풍랑에서 홀로 아프고 서로를 아프게 하고 함께 아프면서 소중해졌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를 지키고 서로 보듬는 법을 배웠고 함께 상처를 여몄다. 우리의 미성숙이 어떠한 고통을 야기할 수 있는지, 그 끝에 파국이라 일컫는 거대한 미궁이 존재한다는 것까지 알고 싶지 않았으나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을 지키려 노력하는 스스로와 서로가 참 애틋하다. 평범한 하루는 쉬이 주어지는 게 아님을 너무 잘 알아서.

현실적인 거야 비관적인 거야
현실을 직시하자는 생각은 가끔 우리를 비관이라는 오류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은 불공평하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선한 의도가 선한 결과로 도출되는 일 또한 당연한 수순으로 이뤄지지 않고 여기에 더해 세상에서 벌어지는 무구한 거짓들은 우리를 한숨짓게 한다. 삶의 한 축인 이해할 수 없는 악함 들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여기서 발동되는 생존 본능은 현실을 비관으로 덮어버린다. 이럴 때일수록 이 둘의 경계를 뚜렷이 해야 한다. 차츰 그 폭을 넓히고 각자의 자리에서 존재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맞닿은 듯 보이나 서로의 위치에서 하나가 되는 지평선처럼. 그러다 보면 우리는 지는 노을과 트는 동처럼 삶이 그러하고 현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지혜롭게 깨닫게 될 테니까.

감정의 너울
감정의 너울이 유독 극단을 달릴 때가 있다. 모든 관계에서 회피하고 싶거나 독한 복수심이 치밀 때 말이다.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 등 다양한 이론으로 인간의 내면을 살펴보려 하지만 대개의 존재는 그리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다. 온전히 선하거나 온전히 악하면 삶에 있어 고뇌라는 건 없을지도 모른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함이 감정의 너울을 만든다. 심한 파도와 풍랑이 일 때 배를 타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삶을 감정의 너울에 던져두어서는 안 된다. 그저 이 진동이 고요해질 때까지 지켜보아야 한다.

깨우침의 연속
우리는 태어나서 배우며 성장한다. 기기, 걷기, 말하기 등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나아가 오랜 학업을 통해 사회를 공부한다. 졸업장을 받고 직업이 생길 즈음 우리는 스스로 다 컸다고 착각한다. 그러고는 나라는 존재를 다른 이의 생, 삶의 순환을 판단하는 잣대로 삼는 미숙함을 저지른다. 살아가며 많은 것들이 어그러질 즈음에야 생의 모든 순간이 깨우침이란 걸 알게 된다. 종국에는 죽음을 깨우치게 된다는 것도 어슴푸레 알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변주의 변주의 변주
여느 날처럼 티브이를 켜고 채널을 돌리다가 한 인물이 했던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잘 되는 것도 내 능력 밖, 잘 되지 않는 것도 내 능력 밖이었다는 말. 그 말을 하는 인물이 참 단단하고 초연해 보였다. 생이라는 변주는 한 번에서 끝나지 않고 죽음의 목전까지 우리와 함께 한다. 이 속절없는 리듬에서도 내 뿌리를 지키는 힘, 그게 참 멋지고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다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난
인생에 정답이란 게 있기는 한 건지 도통 모르겠을 때가 있다. 대부분 그냥 멍 때리며 살거나 시대의 흐름에 머무르며 시간을 보내는데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다. 여러 기출을 살펴 지식을 쌓아도 삶의 문제는 늘 새롭다. 답이겠지, 답이겠거니 하고 풀어낸 것들이 정말 형편없이 구겨져 눈앞에 들이밀어지면 머릿속은 새까맣게 엉키고 얼굴은 허옇게 질려버리고 만다.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것, 그것 외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는 것이다.

깊은 우울
전날까지도 평온했고 보드랍고 따스한 이불에 덮여 곤한 잠을 이뤘다. 그러다 눈을 뜬 아침이 너무나 무거웠다. 세상과 사람들이 다 나를 손가락질할 거라는 생각과 공포, 억울함과 분노가 나를 뒤덮었다. 아직까지도 해소되지 못한 감정의 잔재들이 불순물처럼 떠오른 것이다. 이 깊은 우울은 얼굴의 모든 표정을 빼앗고 육신의 기운마저 앗아간다. 괜찮다가도 금세 괜찮지 않아 진다. 사람들은, 사회는, 세상은 거대하고 아주 오래 그대로일 텐데 그것들을 마주하는 것에 나도 오래도록 지쳐버렸다. 죽고 싶다는 마음과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좀 더 나아지려고 나아지기 위해 나아갔던 모든 걸음에 짓이겨진 꿈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래서 자꾸만 꿈을 버리게 된다. 무섭고 두려워 도망치게 된다. 나는 이 세상과 사회가 사람이 너무도 어렵다. 그들의 생존방식이 버겁고 참혹하고 악하게만 느껴진다. 나는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뿌리내린 그곳을 견디고 시간의 흐름에 소멸과 순환을 맞이하는 한 그루의 나무처럼 나도 그리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남기
인터넷 검색창에 자살, 극단적 선택, 인간혐오와 살인충동이라 치고 관련 글들을 주욱 읽어내 린다. 힘든 시간 속 각자의 공간에서 삶을 견디는 많은 이들을 읽게 된다. 너무 고통스러워 미쳐버릴 것 같지만 그렇다고 단호히 제게 주어진 생을 내치지도 못하는 거다. 사는 게 고통이고 죽음에 이르는 것도 고통이고 혹여나 그 죽음 뒤 무가 아닌 무언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고통이다. 찰나의 기대는 희망이라는 착각으로 반짝이고 자꾸만 삶을 연명하게 만든다. 숱한 혐오 속에서도 움터서 결국엔 살아남기라는 단어를 토독토독 만들어낸다. 나는, 우리는 그럼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넝마인 삶을 붙들고
쫙 빼입은 새 옷이 너덜거리는 넝마가 되어버리는 것은 인생에서 쉽게 마주하고 마는 일이다. 왜 그리 되었는지는 각자의 상상과 경험, 바람에 따라 새로이 각색될 것이나 진짜 이야기는 그 과정을 넘어선 이만 생생히 아는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아니 모르는 이들이 숨의 관습처럼 내뱉는 말들은 넝마 사이 빈 살만을 골라 아프게 에인다. 쓰다 만 모포라도 던져주면 좋으련만. 저들의 이해 밖일수록 해치는 혀의 끝도 독해진다. 무얼 그리 지키려고, 무얼 그리 바라기에, 바람에도 헤지는 넝마에 칼을 댈까. 그럼에도 아직 죽음을 명 받지 못한 생은 이어지는 거다. 넝마인 삶을 붙들고 사는 거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아 우리는 다 넝마야 넝마, 그런데 혼자가 아니니 괜찮은 것 같아, 그럼에도 살아가지는구나 할 것이다. 그렇게 돌고 돌며 서로의 온기가 되어서 우린 아직 삶에 머무는 것이다.

울퉁불퉁 이심전심
참 열심히 살며 진심은 통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힘들면 왜 사람들이 내 진심을 몰라주고 호도하고 왜곡할까 원망이 서렸다. 내 부족함인가, 어리석음인가, 미숙함인가 자책도 많았다. 도통 답은 모르겠고 답답하니 가족에게, 친구에게 물어도 보고 내 삶을 시고 쓴 소화액만 느껴질 만큼 반추도 해봤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진심이 예쁜 거라고만 생각했을까. 사회 속에서 살려면 가면을 써야만 한다는 생각이 싫었고 무겁게 느껴져 끽해야 100년도 못 살 인생 솔직하고 싶었다. 20대 초반까지 불우하고 사랑받지 못한 시절을 자의와 타의로 꽁꽁 숨기며 살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서서히 죽어가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라도 살아야겠어서 나는 솔직해졌다. 내게 나의 삶과 경험, 아픔에 대한 진솔함은 숨, 호흡, 생명이었다. 그래서 내게 단비 같은 것이 진심이니 다른 이들도 그러할 줄 알았나 보다. 그런데 살면서 데굴데굴 구르다 보니 깨닫게 되는 거다. 진심은 제각각, 형형색색, 울퉁불퉁하구나 하고 말이다. 내 바람의 절반은 이뤄졌던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며 피식 실소가 나왔다. 항상 이심전심이었다. 진심으로 대하니 진심으로 대해줬다. 돌아온 진심의 모양이 예상 밖이었을 뿐.

인생은 고통을 지나는 일
힘든 세상 꾸역꾸역 선하고 성실하게 살았음에도 악인을 만나고 억울함을 겪다 보면 삶이 고통이라는 낙인이 영혼에 새겨진다. 이 명제는 반절짜리 답이다. 통 답은 인생은 고통을 지나는 일이라는 거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와 별개로 많은 것들이 강제 선택된 삶은 개개인에게 특수한 결핍과 욕망을 부과하고 여기에 노화, 질병, 죽음이라는 보편적 고통이 더해진다. 그렇기에 모두 다 공평하게도 고통을 지나며 살아간다. 각자의 속도, 방향, 멈춰 섬이 다를 뿐.

속끄덩이 잡기
살면서 겪는 불유쾌한 일들. 그저 단막극으로 끝나면 좋으련만 감정과 기억은 대하장편을 바라듯 지지부진하게 내용을 끌어간다. 그 고통은 주인공이 이를 꾸역꾸역 소화해야만 한다. 우엑우엑 게워내버리고만 싶다. 속끄덩이를 잡고 주욱 뽑아내 속 좀 편해지고 싶다.

억울 누명 오해 평판
이 4개의 단어를 따로 적거나 2개, 3개 조합해 인터넷 검색창에 쳐보았다. 여러 글과 영상들이 주욱 드러났다. 하나하나 들어가 내용들을 살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이 마음에 위로가 될까 해서다. 그런데 읽을수록 마음이 아팠다. 나 같아서.. 이런 속상한 일들이 많아서.. 나 스스로 불필요하고 그릇된 존재가 된 것만 같다. 내 삶은, 인생은 왜 이리도 구차하고 가혹할까. 날 잘 알든, 대강 알든, 모르든 그들 나름의 잣대와 이유로 내가 살아온 시간들은 난도질되었다. 뛰어난 찬사도 친밀도 필요치 않다. 그저 죽어가는 모든 생이 애틋하고 아련하니 주어진 시간 좀 더 같이 웃고 위로가 되면 안 되나 하고 바랐던 거다. 그런 바람들이 비수가 되었다. 진실하지 않은 자에게 진심을 다하면 남은 생은 고통뿐이라던 글귀처럼 미련한 나는 내가 뿌린 아둔함에 무성한 가시밭길을 걷는 중이다. 그 길에도 해는 비치고 하늘은 푸르다. 썩어 문드러진 발 이곳저곳 노란 염증과 벌건 핏물 가득이다.


침습하는 사고와 거짓된 말말말
양심이 없고 가책도 없고 공감이 결여된 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모든 탓을 자신 이외의 것에 전부 돌리니 얼마나 편하겠는가. 그들은 살아있음을 거짓됨으로 증명하고 호흡하듯 새로운 거짓말로 삶을 꾸려간다. 죽음만이 그들의 거짓을 앗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을 질병 또는 천재지변, 사고처럼 만난 이들은 자신도 원인이나 이유를 온전히 찾을 수 없음에도 고통을 당하고 그 원인 자체가 아니냐는 추궁을 받기도 한다. 이는 고통받는 이를 무너뜨리는 도끼날이 된다. 넘실대는 아픔에 온전하고 굳건하며 멀쩡한 이가 얼마나 될까. 하지만 꾸며진 악인이 아닌 진짜 악인의 유창한 거짓말에 고통당하는 이는 나약한 이가 되기도 하고 악인으로 덮어 씌워지기도 한다. 이런 일들에 당도하게 되면 도대체 삶은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이지 끝도 없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호심술
요즘 즐겨 보는 드라마에 여주인공이 한 말이 마음에 콱 와서 박혔다. 몸을 지키는 호신술보다 마음을 지키는 호심술이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거였다. 그런데 정말 살다 보니 살아보니 마음을 지키는 게 참 어렵고 귀한 일이더라. 마음이 센 사람이 되고 싶다. 수도 없이 짓밟혀도 거짓이 아닌 진실을 택하고 나를 대함에, 다른 이를 대함에 진솔하고 진심인 그런 고되고도 어려워 상처투성이뿐인 길을 굳세게 헤쳐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멍청하고 미련해 보여도 내겐 그런 삶이 우직하고 단단해 보여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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