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툰엄마선생님 Nov 19. 2024

얼굴 없는 인형

발도르프 인형 만들기 (feat. 똥손)

 "원장님, 전 틀렸어요. 저, 솔직히 저희 엄마도 포기한 똥손이에요."


 뜨개질을 하겠답시고 대바늘은 들었는데, 코 잡는 방법도 몰랐다. 분명 코를 10개만 잡았는데, 왜 나는 진도가 나갈수록 코도 점점 늘어나는 건지? 밤잠도 설쳐가며 뜨개실을 엮었다, 풀었다를 수없이 반복하고, 원장님이 멱살 잡고 끌고 가주신 덕에 완성한 나의 첫 뜨개 인형은 귀여운 오리 모녀. 고작 주먹만 한 오리냐고 놀릴 법도 한데, 워낙 똥손인 나를 아는지라 다들 감탄을 금치 못한다. 특히 엄마가 만든 인형이라며 딸아이가 인형을 안고 겅중겅중 뛰는 모습을 보니 뜨개질하느라 아팠던 손마디가 낫는 느낌이다. 이로써, 인형 만들기는 끝난 알았다면 오산. 양모인형부터 아기 인형까지 줄줄이 아직 인형 만들기가 남았다는 말에 잠시 절망했다. 신이시여, 저에게는 왜 금손을 주시지 않으셨나이까.



 발도르프를 시작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발도르프 인형만들기이다. 발도르프 인형들은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 떠올리는 인형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당연하게도 플라스틱 인형은 없다. 뜨개실, 천, 양모 등으로 인형을 만든다. 플라스틱의 차갑고 매끈한 촉감이 아니다. 따뜻하고 폭신폭신하다. 만든 재료에 따라 촉감도 다양하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손에서 놓지 않아 손때가 꼬질꼬질 묻었지만, 그게 또 정감 있어 보인다. 몽글몽글 솜을 넣은 인형들은 손에서 떨어뜨려도 부서질 걱정이 없다. 천 속에 쌓인 작은 씨앗들이 찰찰 소리를 내면 그 자체로 악기가 된다. 눈도, 손도, 귀도 즐거운 놀잇감이다.

 발도르프의 인형들은 손으로 만든다.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이 아니기 때문에 만드는 사람의 손에 따라 모양도 크기도 생김새도 달라진다. 같은 사람이 만들더라도 똑같은 인형은 하나도 없다. 내가 만든 인형은 신기하게도 우리 딸을 닮아있었다. 딸아이가 가지고 놀 생각을 하며 만들어서 그런가 보다. 옆에 앉은 엄마의 아기 인형은 아들내미를 닮아 개구져보인다. 귀엽고 앙증맞은 인형들을 옹기종기 놓고 보니, 사람마다 생김새가 다르듯 정말 인형들마다 개성이 넘친다.

 나무로 만든 인형은 어떨까?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손으로 직접 나무를 깎고, 다듬어 선물해 주신 루돌프가 벌써 우리 집에만 5마리가 된다. 오래 가지고 놀아서 어떤 녀석은 다리를 잃었고, 어떤 녀석은 뿔이 없어졌지만, 아쉽지 않다. 아이들이 직접 지천에 널린 나뭇가지 중 적당한 것을 잘 주워서 치료해 주면 처음 모습 그대로 다시 돌아간다. 세상에 이런 장난감이 어디 있겠는가.

 직접 만든 인형은 그만큼 애착이 간다. 애착을 가진다는 건, 아낀다는 뜻. 엄마가 만든 인형, 엄마가 만든 달팽이 끈. 엄마만 만들지 않는다. 일과 중에는 아이들도 바느질을 한다. 바늘이 아니라 마술 도구다. 아이가 만든 천 반지, 애벌레, 작은 하트 지갑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는 1호 보물이 된다. 차가운 플라스틱 놀잇감들은 우리 집에도 있다. 여자 아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티니핑 녀석들이 꽤 있는 편이다. 살 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얻은 양 호들갑을 떨더니만, 며칠 지나지 않아 베란다 구석에서 이 작은 녀석들이 발견된다. 호기심에 반짝 관심을 가졌다가 그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서서히 물러나 버려진 장난감들을 중고 거래한 경험은 어느 가정에나 있을 것이다.


 이만큼만 보아도 발도르프 인형, 참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인형의 매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발도르프의 인형들은 얼굴이 없다. 눈도, 코도, 입도. 가끔 점 같은 눈이 달린 것들도 있지만, 내가 인형들은 대체적으로 눈코입이 없었다.


"이 인형 하나가 새댁이 되었다가, 할머니가 되었다가, 또 어떨 땐 어린아이가 되기도 해요. 표정도 아이들 상상 속에선 웃고, 울고, 화내고. 다 그릴 수 있어요."


아이들의 생각 주머니 속에서 얼굴 없는 인형들은 살아서 숨을 쉬고, 백만 가지 표정을 가지게 된다. 어른들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표정이 아니라 아이들 스스로 상상하는 얼굴로 인형들은 그렇게 생명을 얻는다.



 그날도 어김없이 모인 자리에서 여전히 인형 만들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앞에 앉은 엄마의 아기 인형은 벌써 모자도 쓰고, 손발도 생겨있다. 내 인형을 내려다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흐르는 진땀을 닦고, 다시 바늘을 들어 한 땀 한 땀 꿰매본다.

"발도르프 인형이 좋은 점이 또 뭔지 알아요? 유연해서 조금 잘못 꿰매도, 조금 잘못 떠도, 손으로 이렇게 조물조물 움직이고, 펴주면 아무도 잘못 만든 줄 모른다는 거지요."

세상에나, 아까 분명 바느질 땀이 삐뚤빼뚤했는데. 이거 내가 만든 거 맞아?

똥손이 금손이 되는 마법.

발도르프는 똥손 엄마도 춤추며 금손인양 인형을 만들게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이스트 출신 부모님이 아이를 위해 선택한 교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