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발도르프에 보내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원장님과 상담을 하던 중 받은 질문이다. 카이스트라면 대한민국 이공계 대학의 최고 정점에 있다는 그 대학, 내가 아는 그 카이스트가 맞겠지?
‘오! 역시 머리 좋은 사람들도 이런 교육을 선택하는구나!’
욕심 많은 엄마가 아이를 위해 선택한 길의 정당성을 얻은 기분이었달까? 마음의 소리를 숨기고 원장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원장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칼날 같던 바람도 조금씩 무뎌져가고, 나도 아이도 어느새 새로운 곳에 적응해 나가고 있을 때 즈음. 어느 따뜻한 봄날, 그날은 고된 일상을 위로하듯 토닥토닥 단비가 촉촉이 내리던 날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아이가 소리쳤다.
“비 온다!”
“비와? 에구.. 오늘은 실내에서만 있어서 심심하겠네, 어쩌니?”
울상을 짓는 나를 보던 아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응? 왜? 비 오는 날 좋아. 우리 이렇게 촛불 켜고, 티타임 하는 날이야! 선생님이 노래를 음음음~ 부르면 다 같이 테이블에 앉아. 선생님이 커튼을 활짝 열어서 비님이 보이게 해 주고, 가운데 작은 촛불도 켜주시는데 진짜 예뻐. 그리고 쪼끄만한 잔에 차를 쪼로로 주시는데 정말 정말 따뜻하고 맛있어! 나는 비 오는 날이 제일 좋아!”
잘 돌아가지도 않는 혀로 ‘티 타임’이라는 영어단어를 어렵사리 말하면서 아이는 두 손을 모아 차를 홀짝이는 흉내를 낸다. ‘티타임’이라니, 더군다나 유치원에서 티타임이라니. 너무너무 귀엽잖아!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한다. 비 오는 날의 축축한 흙냄새도, 톡톡 창가를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도. 따뜻한 커피 한 잔 손에 쥐고 읽히지도 않을 책 한 권을 엎어두고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땅이 비에 젖어 들어가듯이 혼자만의 공상에 젖어 들어가는 나의 모습도 좋아한다. 바쁘게 일상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이런 한가로운 시간은 사치처럼 느껴져 비 오는 날에 감상에 빠져드는 일은 드물어졌다. 이제는 ‘비 오면 빨래 안 마르는데, 비 오면 차 밀리는데..’ 이런 현실적인 생각부터 떠오르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속세의 때가 묻은 어른인 건가 싶을 때도 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이런 ‘감성’적인 시간을 소위 ‘손발이 오그라든다’라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감성보다는 현실의 눈앞에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이겠지. 어디 어른들만 그럴까. 조금만 크면 영어, 수학 문제 하나라도 더 푸느라 비 오는 날 창밖을 내다볼 여유도 없을 테고, 아예 창문이 없는 곳도 있으리라. 창문이 있다 해도, 누가 바쁘게 하던 일을 멈추고, 비를 바라보며 촛불에 불을 밝히고 따뜻한 차를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텔레비전 채널을 의미 없이 휙휙 돌리다 마주한 장면 속, 카이스트 출신의 한 연예인이 아내가 우는 데도 왜 우는지 몰라 안절부절이다. 아내가 “이럴 땐 조용히 휴지를 내미는 거야.”라고 가르쳐 준다. 그 후로 그는 아내가드라마를 보고 울면, 입력된 대로 출력하는 기계처럼 휴지를 대령한다고. 그냥 웃고 넘긴 이야기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힘들어하는 사람들도 있구나라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원장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던 대한민국 굴지의 대학을 나온 부모님들이 좋다는 유치원을 모두 마다하고 발도르프를 선택한 이유, 바로 '감성'이다. 기계를 누구보다도 잘 다룰 수 있을 그들이지만, 나무 한그루, 풀 한 포기에도 감동하고 노래를 부를 줄 아는 그 감성이 필요했고, 비 오는 날 창문을 꼬물꼬물 기어오르는 달팽이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감수성에 목말랐던 것이다.
나는 우리 안의 ‘감성’을 자극하는 교육은 다른 사람에게까지 그 ‘울림’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우리 아이들이 비 오는 날 촛불을 켜고, 꿈꾸는 듯 몽롱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시던 기억. 선생님의 낮은 허밍을 들으면서 친구들과 소곤댔던 그날의 추억은 아마 많이 자란 후에도 우리 아이들의 가슴속에 남아 작은 것에도 감동할 줄 알고, 사소한 것에서도 행복해하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을 도와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 울림은 비 오는 어느 아침, 아이와 나눈 대화에 어른이 되어 가며 자연스레 무뎌지고 흐려져 이제 죽어가고 있는 나의 가슴속에도 한 줄기 ‘감성’을 되살려 주었다.
글 속에 등장하는 카이스트 출신 분들을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사람은 저마다 다르고, 어떤 것이 좋다 나쁘다, 옳고 그르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글은 제가 겪고 느낀 것을 쓰는 경험담이니 양해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위에 언급된 연예인의 팬입니다. 또, 인터넷을 떠돌다 만난, 카이스트생이 썼다는 시에 깊은 감동을 받기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