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나무문이 삐걱 열렸다. 등원은 딸이 하는데, 긴장은 내가 백 배쯤 더 한 것 같다. 떨리는 손을 감아쥐고 아무렇지 않은 척, 작은 나무 의자에 엉덩이를 반 정도 걸쳤다.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와 우리 딸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자기가 그렸다며 그림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미안하지만 초보 엄마는 너무 떨리고 긴장한 상태라 무슨 대답을 해주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선생님들의 목소리도 조용조용 차분하다. 내가 본 어린이집 선생님들은 톤이 높고, 발랄한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 아이들은 언니, 오빠, 동생 할 것 없이 어울려 뚝딱뚝딱 집을 짓거나, 나무 블록을 쌓거나, 그 작은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몇 안 되는 설명회를 다니는 동안 보아왔던 어린이집 한가운데를 차지한 휘황찬란한 미끄럼틀도, 플라스틱 장난감도 없다. 대신, 오래되어 손 때가 조금 묻어 보이는 나무조각들, 끝에 말머리가 달려있는 긴 막대기, 보자기로 보이는 수많은 천조각, 뜨개실로 엮은 긴 줄, 돌멩이와 조개껍데기, 천으로 만든 인형들이 전부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서도 아이들은 까르르 웃으며 자신들만의 놀이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뭔지 모를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말 그때의 묘한 기분은 지금도 말로, 글로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비싼 게 좋은 것인 줄 알았고, 그런 것들을 사줄 수 없어서 아이에게 미안해하던 날들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선 그런 게 다 필요 없었다. 그냥 일상에 널린 것들이 아이들의 놀잇감이 되었다.
발도르프를 처음 만나던 날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길을 가다 마주한 덩굴이 우거진 나지막한 건물 하나. 낡은 나무문 앞에 바람 부는 대로 삐그덕 대며 흔들리는 간판.
‘여긴 뭐 하는 곳일까?’
초록창을 켜고 검색부터 해보았다. 발도르프, 가물가물한 기억 저 편 어디선가 들어본 듯도 하다. 이럴 때 인터넷이라는 좋은 도구를 개발한 누군가에게 감사하다. 궁금할 땐 손가락만 움직이면 답이 절로 내 눈앞에 나타나니까. 구구절절 다른 말들은 머리로 쉬이 들어오지 않았다. 단 하나, “자연스럽게 아이 스스로의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자연주의 교육”이라는 글자만 확대가 된 듯 눈에 콱 박혔다. 저거야 말로 내가 원하고 찾아다녔던 그 교육이 아니었던가!
아이는 벌써 4살. 12월 생이라 개월 수로는 26개월이지만, 같은 또래를 키우는 조리원 엄마들은 일찌감치 어린이집을 알아보고, 여기저기 좋다는 곳의 입학 설명회를 다니느라 바쁘다. 심지어 이미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들도 많다. 요즘은 100일만 지나도 어린이집에 보내는 경우가 흔하니, 나처럼 두 돌이 지나고도 엄마 품에 싸고 있는 게 드문 일이었다. 나도 한 두 군데 놀이학교며 영어유치원이라는 곳을 따라가 설명을 들은 적도 있다. 프로그램이며 체험활동이며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그들의 소개를 들을 때도, 솔직히 나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물론, 원비에도 입이 쩍 벌어졌다. 한 달에 내 월급의 3분의 1을 내고도 등하원 차량비, 교재비, 원복 맞춤비 등등을 더 내야 하다니. 나의 분수에 맞지 않아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마음 한 편으론 나도 아이를 저런 곳에 보내 ‘우리 애는 5살에 벌써 영어로 말하는 거 있지?’ 하고 잘난 척을 해보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러다 만난 이곳은 마치 무슨 자석이라도 달린 것 마냥 나를 이끌었다. 땡그랑, 바람따라 흔들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들어선 곳에서 처음 마주한 나무에 새겨진 글귀. 더 이상 원장님의 설명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행복한 인재 육성]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주는 곳이라니, 뭐가 더 필요할까. 무조건 여기다!
첫째는 나의 출근과 맞추어 조금은 이른 나이에 발도르프를 경험하게 되었다. 나도 엄마는 처음이었기에, 이런 교육기관에 아이를 맡기는 것도 물론 처음이었다. 떨리고 초조한 마음을 한동안 숨길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확신했던 첫인상과 달리, 이게 정말 최선일까를 수없이 고뇌하기도 했다.
‘남들은 지금쯤 애들한테 수학을 가르칠 텐데..’
‘우리 애는 한글도 아직 모르는데.. 다른 애들은 영어로 말도 하던데..’
‘이대로 학교에 갈 수 있는 건가? 우리 애만 뒤처지는 건 아닌가?’
그럼에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끊어내지 못한 걸 보면 발도르프 특유의 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한다. 내 부족한 필력으로 다 담아내지 못함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런 발도르프에 올인한 시간들이었다. 큰딸을 졸업시키고, 둘째까지 당연하다는듯 선택한 발도르프. 길가다 만난 간판 하나 덕분에 새로운 세상에 발을 들이게 된 것이다. 그 선택이 엄마인 내가 세상을 보는 시각을을 달라지게 했고, 소중한 두 아이의 눈빛을 달라지게 했다. 8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발도르프와 함께 하며 겪어왔던 나와 우리 딸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이 공간에 풀어보려 한다.
간판 아래에 서서, 나와 같은 불안으로 망설이는 중인 후배 부모에게 따스하고 작은 도움이 되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