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직면하는 것.
199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똑똑한 이비인후과 의사 아빠와 그 망할 시대상 때문에 교사를 그만두고 주부가 되어야 했던 누구보다 똑똑한 엄마, 그리고 나보다 훨씬 순하고 똑똑한 네 살 위 오빠 사이에서 나는 종종 충분히 똑똑하지 않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확실하게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 딱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 운동.
물론 여러 스포츠를 도전했던 아빠를 닮은 면도 있겠지만 나는 언제나 운동에 재능이 있었다.
피겨스케이팅을 시작하고 금방 매 대회마다 수상을 했고 무엇보다 학교 체육 시간에 여자 남자 다른 기준의 수행평가를 반대하며 꼭 남자 동급생들을 이기려고 아득바득하고는 했었다.
어쩌면 그 어릴 적부터 나는 오기로 가득 차고 차별을 싫어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다.
두 번째, 언어.
문과 출신의 엄마와 만 11살에 다녀온 일 년의 캐나다 삶 덕분일 수 있지만 네 개의 언어를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와 "한다"는 꽤나 다르긴 하지만 굳이 세보자면 모국어 한국어, 제2의 국어가 될 영어, 외고에서 배운 프랑스어, 중학교와 대학교에서 배운 일본어.
내가 다양한 언어를 배운 이유는 문과생이었다는 가장 큰 이유가 있겠지만 더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작품들과 이어 줄 수 있는 매개체라는 거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세 번째, 글쓰기.
사실 대학 시절부터 글 쓰는 동아리를 하며 몇 십 년 후 동문회록을 작성하는 아빠를 닮아서일 수도
국어국문교육학과를 나온 엄마를 닮아서일 수도 있지만
나는 글 쓰기를 잘하고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글쓰기 대회 수상부터 중학교 시절 글쓰기 영재부, 그리고 대학 시절 복수 전공하게 된 비교문화문학과까지, 나는 글 쓰기를 잘하고 좋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들에게 내 글을 내보이는 게 참 부끄럽다.
글을 쓸 때만큼은 나의 가장 진실한 면모가 나오기 때문에 마치 벌거벗겨진 느낌이랄까.
그래서 나는 내 글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게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지만 인간은 모순의 존재 아니던가.
부끄러움이라는 껍질 속에는 내 글을 읽고 웃고 울고, 위로받고, 영감을 얻기를 바라는 열매가 있다.
그리고 인간은 유한의 존재 아니던가.
그렇기에 어떻게라도 본인의 일부를 이 세상에 남기고픈 그 욕구가 나를 글쓰기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인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 아니던가.
초등 중학교 시절 내 글을 칭찬해 주던 선생님들.
대학 시절 내 글을 읽고 감명받았던 교수님과 지금은 내 절친한 친구의 남편이 된 친구.
브런치라는 매체를 내게 알려준 내가 애정하는 친구, 탱탱구볼 작가.
그래서 나는 거의 서른이 된 이제야 공개적인 매체에 내 글을 연재해보려고 한다.
나의 지독한 오기가 계속 연재할 추진력을 주기를,
언어에 대한 애정이 다양한 글쓰기의 양분이 되기를,
죽음을 부분적으로라도 극복하고 파는 인간으로써 계속 글을 쓰고 나의 가장 연약한 모습을 직면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