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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울림 Jun 19. 2024

Love of My Life

고집쟁이 내가 선택한 너

남편을 처음 만난 건 2020년 1월의 끝이었다.


나의 두 번째 학부생활의 첫 학기,

2020년 봄학기가 시작하기 몇 주 전 미국으로 출국했다.

(Semester제로 운영되는 미국 학교의 경우 첫 번째 학기는 가을학기로 8, 9월부터 12월이고 두 번째 학기는 봄학기로 1월부터 5월이다.) 


외국인인 내가 살게 된 기숙사에는 여러 국가에서 온 교환학생 친구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운명이란 게 참 재미난 게

한두 주 후에 내 첫 번째 학부를 보냈던 한국 대학교의 이웃 학교에서 온 교환학생 친구들도 나의 룸메이트로 이사 왔다.

다들 똑 부러지고 사랑스러워서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다들 같이 저녁 해 먹고 놀러 나갈 때 나는 공부한다고 매번 빠지고는 했다.

그렇다, 나는 저 상큼한 청춘 냄새가 나는 이쁜 친구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길고 긴 방황 끝에 얻게 된 두 번째 기회를 그저 그렇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나의 하루는 학교, 학교 내 헬스장, 집의 반복이었다.


운동을 좋아하고 몸을 며칠 안 움직이면 몸도 마음도 찌뿌둥해지는 나의 습성에다가

한국 입시 생활을 하면서 뼈저리게 느낀 공부는 체력, 엉덩이 힘이라는 깨달음까지 더해져

학교를 가면 잠깐이라도 헬스장은 무조건 들렀다.


중학교 시절 고등학생이었던 오빠가 상담받으러 간 PT 선생님한테 간택 당해 한동안 나도 PT를 받았다.

(내가 기구에 흥미를 보이자 바로 시켜보시고는 운동에 소질 있다면서 시켜보라던 김종국 닮았던 동안 PT 선생님, 잘 지내시나요? 선생님의 조기 교육 덕에 저는 미국 헬스장 프리웨이트 존에서도 기죽지 않고 선수생활 하냐고 질문받는 멋진 여성이 되어있습니다.)

(운동 죽어도 싫어하는 엄마 제외하고 아빠까지 받은 우리야말로 로열 커스터머..)


덕분에 나는 혼자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게 어색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바로 내 단신의 키로 닿지 않는 기구들...


미국에 온 지 3주 정도 지나 여느 때처럼 내 루틴대로 학교 헬스장에 도착했다.

가벼운 jumping jack으로 몸을 데우고 프리 웨이트 존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확보하고 무게 치기 전 거울을 보면서 데드 리프트 자세를 잡아보고 있었는데

내 시선의 끝에서 웬 덩치 큰 아이가 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무시하고 덤벨을 가지러 갔는데 이번에는 그 아이가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덤벨을 들고 자세를 잡고 거울을 째려보았는데 그 아이가 반대쪽 옆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저 친구 나 거울 보는 거 보고 비켜주는 거구나.'


항상 사람들 가득 찬 학교 헬스장 프리 웨이트 존에서 그 정도로 멋진 헬스장 에티켓을 본 적이 많지는 않아서 좀 감동 먹고 속으로

'짜식, 운동 맛있게 해라.'라고 생각하고 나도 내 갈 길을 갔다.


마지막 운동 기구에 도착했다.

이런, 팔이 간신히 닿기는 하는데 도저히 내가 내 높이로 다시 조정할 수가 없었다.


'하, 도와달라고 직원 데리러 가야겠다.'


(시선의 끝에서 또 보이는 덩치.)


바로 옆에 아까 프리 웨이트 존의 매너남이 세트 중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것 좀 도와줄래? 나 키가 안 닿아..
아, 당연하지. (도와줌.)
오, 완전 고마워. 그리고 아까 프리웨이트 존에서 나 비켜줬던 것도 고마워.
아, 당연한걸. 운동 자주 해?
가능하면 맨날 하려고 해. 나 pre-med(의대 준비생 신분)라서 운동이라도 안 하면 미칠 것 같거든, 하하.
나도 pre-med야! 나는 이번 학기가 마지막 학기라서 이미 MCAT(의대 입시 시험)도 봤어.
우와, 대박. 나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 다 하고 이번에 학부 다 다시 하려고 왔어. 그래서 이번 학기가 첫 학기고 MCAT은 아직 멀었어.
들어보니 너도 생물학과구나. 내 말로 그러긴 좀 웃긴데 나 MCAT 꽤 잘 봤어. 혹시 내 노트 줄까?
오, 그러면 완전 고맙지! 그리고 큰 시험 끝낸 거 축하해~
근데 혹시 몇 점 맞았는지 물어봐도 돼? (내심 뻥튀기하는 건가 했다.)
고마워. 나 상위 7% 성적 받았어.
(좀 독특한데 MCAT은 먼저 절대평가로 성적이 메겨지고 그날 나와 함께 시험 본 사람들 성적을 쫙 줄 세우기 해서 상대평가로 최종 성적과 퍼센트를 메긴다.)


그의 높은 성적에 나는 잽싸게 서로의 이름과 이메일을 교환했다.

너무 고마운 마음에 한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I'll buy you a dinner!
내가 밥 한 번 살게!


아직 미국화가 덜 되었던 그녀는 자신이 무슨 발칙한 말을 했는지 전혀 몰랐다.

그 말이 미국에서 캐주얼하게 데이트 신청을 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다.


그렇게 동상이몽으로

그녀는 pre-med 생활 팁도 얻고 새로운 친구도 얻으려는 마음으로

그는 잠재적 여자친구를 알아가려는 마음으로

그들은 그녀의 기숙사 1층에서 만났다.


물론 마음가짐이 그랬다 보니 그녀는 기숙사 친구들이랑 놀다가 헐레벌떡 1층으로 내려왔고

결국 추운 1월 그를 밖에서 10분이나 기다리게 했다.

(친구들과의 약속에서도 진짜 지각 잘 안 하는데 이 아이랑은 정말 아무 흑심도 생각도 없었어서 나도 모르게 지각했다. 하지만, 남편 말로는 자기 만날 때마다 지각했다고 한다, 허허.)


미안하다며 야단 떨며 기숙사 문 밖을 나온 그녀.

그런 그녀를 보며 청자켓, 청바지를 입고 기둥에 기대어 싱긋 웃던 그, 

좀 멋있었다.


둘은 저녁을 먹으러 갔다.

청자켓을 벗은 그는 안에 얌전한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는데 니트 아래 옹골찬 팔과 가슴 근육에 그녀는 놀랐다.

분명 헬스장에서 더 벗은 몸을 봤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제 제 남편이니깐 편히 쓰겠습니다. 고소의 나라 미국인 남편한테 성희롱 고소하지 말라고 말해뒀습니다. 뭐, 어차피 아는 한국말은 배고파/불러/아파, 돼지, 힘들어, 더워/추워, 죽는다, 하지마, 하지 말라고, 야 정도밖에 몰라서 못 읽겠지만.)


그와 그녀는 밥 먹는 내내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신기하리만큼 공통점을 느꼈다.

본인에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 왜 의사가 되고 싶은지, 어지러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우리 둘에게 운명적으로 소중한 미국의 한 도시에 대해서.

그가 매 여름 뵈러 가는 할아버지께서는 알고 보니 그녀가 1년간 교환학생으로 살았던 그 도시에 계셨고,

심지어 매주 한 번은 들르던 그녀의 아파트 옆옆 블록에 있던 동네 서점에서 그의 할아버지께서 20년간 일하셨고,

그녀와 그녀의 룸메이트가 차를 타고 지나다니던 거리의 이쁜 집이 그의 할아버지 집이었다는 걸.


서로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껴갈 때쯤 그녀의 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어디야? 우린 여기 먼저 와 있어.
그 애랑 잘 돼 가나 보네? 꺅, 더 있다 와~
여기 도착하면 그냥 편히 전화해.


그녀는 자신이 잊고 있었던 약속을 떠올렸다.

9시까지 유럽 룸메 친구들이랑 라틴 음악 클럽에 가기로 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리되었을까.


그녀는 그에게 또 사과하게 되었다.

그는 정말 괜찮다며 자신의 트럭으로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심지어 그녀가 사기로 했던 저녁까지 결제하고 남은 음식을 들고 그녀한테 미소 지으면서 말했다.


다음에 네가 사. 이래야 너 한 번 더 보자.
You get it next time. That way, we can hang out again.


트럭을 모는 뼛속까지 남부의 아들, 서울깍쟁이 딸내미 마음을 마구 헤쳐놓고 있었다.


'망했다.'

그녀는 생각했다.

분명 미국 오기 전에 친구들한테 가서 연애 안 하고 가볍게 데이트나 하면서 공부나 할 거라고 떵떵거리고 왔는데

이거, 이거 미국 온 지 한 달도 안 돼서 약속 못 지키게 됐다.


그는 운전석에, 그녀는 조수석에 앉아 10분 동안 또 열심히 수다를 떨었다.

그녀는 친구들 기다리는 건 생각도 못하고 클럽이 왜 이리 가까운 건지 야속해하고 있었다.

클럽 입구에 다 와서야 친구들이 떠올라 그에게 급히 인사하고 남은 음식까지 들고 들어갈 뻔했다.

그런 그녀를 클럽 경비가 멈춰 세웠다, 외부 음식 반입 불가라고.

'망했다.'


청자켓의 그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가져가 줄게.
내일모레 도서관 데이트 어때? 그때 네 남은 음식 돌려줄게.
내가 한 번 더 보자고 했잖아.
Don't worry about it. I'll take it for you.
What about a library date day after tomorrow? I'll bring your left over.
I told you we will hang out again.


당황한 그녀는 그가 무슨 앙큼한 말을 했는지 머리로 제대로 이해하지도 않고 

그에게 무한 감사를 표하며 친구들과 즐겁게 춤추러 들어갔다.

그런 정신머리 없는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그는 외쳤다.


네 인질 구하러 꼭 와~
Don't forget to come get your hostage~


공통점. 운명. 이끌림.

만난 지 3일 만에 2020년 2월 2일 우리의 연애는 시작됐다.


모든 연애가 그렇듯 힘들 때도 좋을 때도 있었다.

우리는 제일 좋고 순탄해야 할 연애 초기가 제일 힘들었다.


사귄 지 2주 만에 나는 2주간 병원 신세를 했고 홀로 타지 생활 중인 나를 이 친구가 나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했다.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인지 어느 날 밤 갑자기 몸이 미친 듯이 아팠다.

사실 이 때는 기숙사에서 나오고 혼자 아파트로 이사 가 있을 때라 정말 나 혼자 낑낑 대며 아팠다.

고통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결국 걸어서 5분 거리인 병원으로 우버를 불렀다.

하필 병원이 공사 중이라 우버에서 내려걸어 돌아간 2분 동안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이를 꽉 물고 몸을 부여잡고 걸었다.

응급실 접수처에 다 다다르고 간호사가 무엇 때문에 왔는지 묻자마자 그 앞에서 토를 했다.

그 덕분에 기다리던 사람들 모두 제쳐두고 바로 휠체어를 타고 피검사를 받고 1인실로 이동했다.


그러고 나서는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고통 때문에 계속 모르핀을 맞고 있었기에 첫 일주일 반 동안의 병원 생활에서 기억나는 건 몇 가지밖에 되지 않는다.


날이 밝자마자 달려온 남자친구가 내 손을 잡고 간호사와 대화하는 모습

헬보이처럼 부은 내 왼손을 잡은 채 믿음직스럽게 의사와 대화하는 남자친구의 옆모습.

남자친구가 보러 온다고 했는데 떡진 머리에 누추한 병원복 몰골 (양말, 뒤가 뚫린 원피스 병원복, 너무 얇디얇은 일회용 팬티..) 때문에 당시 돌봐주던 야간 간호사에게 2주 사귄 남자친구한테 이 모습은 못 보일 것 같아 좀 도와달라고 해서 연신 고맙다면서 머리가 묶인 일.

1인실 응급실에서 내 담당 간호사였는데 외국에서 혼자 공부하러 와 보호자가 남자친구 밖에 없다고 했더니 나를 기억하고 걱정해 2인실 내과로 병실을 옮긴 후에 나를 찾아와 줬던 간호사.


여러 검사와 다양한 의료진을 만났지만 내 주치의는 정확한 원인을 파악하지 못했다.

일단 정신도 돌아왔고 고통도 사라졌으니

헬보이 왼팔과 링거 테이프에 난 알레르기 상처는 일단 두고 항생제를 지어주고 퇴원시켰다.


하지만 그 항생제가 문제일 줄이야.

집에 돌아온 다음날 아침 약을 먹자마자 바로 온몸에 미치게 가려운 발진이 났다.

바로 응급실로 걸어갔다.


그렇게 한바탕 응급실 소동이 지나고 나니 이번에는 코로나가 터졌다.

나는 막바지까지 버텼지만 부모님의 호출과 한국 정부의 보호에 돌아왔다.


공항에서 남자친구와 담담하게 인사를 나눴지만 남자친구의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우리 계속할 수 있을까?


그렇게 3개월이 흘렀다.

여전히 수업은 온라인으로만 진행되어 미국에 돌아가는 한국 유학생들이 거의 없었지만

나는 마음이 급했다.

부모님한테 시차 때문에 공부에 집중하고 어떻게라도 연구 경험을 빨리 잡으려면 먼저 들어가겠다고 했다.

물론 남자친구가 보고 싶은 마음도 컸고.

(결혼한 후 아빠가 그랬다. 그때 남자친구 때문에 간 게 제일 큰 거 아니냐며. 역시 자식은 부모님 손바닥 안이다.)


그때 워낙 코로나 초기고 전 세계가 아직 많은 것을 모른 체 두려움이 가득하던 시기라

공항에서 만난 그립던 남자친구와 딱 2초만 안고 바로 차로 이동했다.

차 안에서도 나는 뒷좌석, 남자친구는 운전석.

나는 아파트 로비에서 남자친구에게 부모님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전달했다.

아픈 나를 본인들 대신에 잘 챙겨줘서 고맙다는 선물.

남자친구는 당연한 일이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하고 나와 내 커다란 짐을 아파트에 올려주고 떠났다.


몇 개월 만에 만났는데 코로나 때문에 제대로 손도 못 잡고 마스크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못 봤더니

괜히 남자친구가 나를 좋아하는 건 맞는지 하는 엉뚱한 머릿속 화풀이를 했다.


물 한 잔 마시면서 속을 달래려고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에는 삐뚤빼뚤하지만 깔끔한 남자친구의 손 편지가 쓰여있었다.

(손편지라고 쓰고 내 깜지 노트에서 뜯어낸 격자 종이라고 읽는다.)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 다 새 거야. 폭동 때문에 밖에 안 나가면 좋을 것 같아서 사놨어.
피처 안에 있는 물도 새로 채웠어. 여기 돌아왔을 때까지 꽃들이 생생히 살아있으면 좋겠다.
집에 돌아온 걸 환영해, Nee-Noona(내 누나)가 다시 돌아와서 너무 기뻐!
(참고로 내 남편은 3살 연하다. 나는 능력자다.)
(자신이 적었음을 알리기 위해 내가 부르던 애칭인 곰돌이를 직접 그렸다. 아래 사진 참고.
 내 남편은 참 바르고 똑똑하고 말도 잘하지만 그림은 잘 못 그린다.)

(하필 내가 미국에 돌아왔을 때는 코로나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아파트 바로 앞에서 폭동이 있었다.

원래는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한 억울한 흑인 남성의 죽음을 추모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시위였지만

사람들의 분노에 도심 상점들의 유리는 다 깨져있었다.
그들, 아니 우리의 분노가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Black Lives Matter.)


뒤 돌아보니 책상 위에 화사한 핑크빛 꽃이 화분에 꽂혀있었다.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바보, 이런 거 해놨다고 얘기를 하지. 역시 말보다는 행동파라니깐.'

냉장고를 열어보니 평소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손 편지가 붙은 샴페인과 케이크도 있었다.

샴페인에는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집에 오자마자 바로 열라는 메시지,

케이크에는 며칠 후 내 생일까지는 열지 말라는 메시지.


이렇게 귀여운 남자친구에게 내가 혼자 머릿속에서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당장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고마움을 전했다.

물론 생일도 나 홀로 아파트에서 보내야 했고 코로나 때문에 서로 한 달에 한 번 밖에 못 보는 상황이 몇 개월 지속되었지만 남자친구가 보여준 예쁜 마음과 행동에 나는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 초기는 어쩔 수 없는 상황적 역경을 뛰어넘어 더 굳건하게 사랑을 키울 계기를 주었다.


연애한 지 2년 하고 2개월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데이트를 했지만 내 소울푸드 한국식 중국집에 남자친구를 안 데려갔던 걸 깨달았다.


2022년 3월 18일, 처음으로 남자친구에게 내 소울푸드를 먹였다.

사실은 남자친구보다도 나를 위한 짬뽕과 탕수육

그리고 혹시라도 입맛이 안 맞을 남자친구를 위한 치킨 로메인과 크랩 라군, 군만두.

배가 터져라 시키고 먹었다.

(남편이 결혼 서약에 "돼지s in crime"이라고 쓸 만큼 우리는 먹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혈관 안 막히려면 운동을 열심히 해야 한다.)

 

나는 새로이 이사한 내 보금자리에 돌아오자마자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바리바리 싸 온 음식을 정리했다.

머리를 냉장고에 처박은 채로 오늘 먹은 음식에 대한 찬사와 다음에는 짜장면을 먹자며 신나서 떠들고 있었다.


뒤에서 남자친구가 나를 세 번째쯤 불렀을 때야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본 남자친구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영롱한 하늘색 토파즈가 박힌 반지를 들고.


너무 놀라서 내가 멍하니 있자 남자친구는 반지를 든 손을 한 번 쓱 내 쪽으로 들었다.


Will you marry me?


아니, 중국집 먹고 너저분한 잠옷 입고 있는 나한테 이 시점에 청혼을 한다고?

퍼포먼스 이런 거 하나 없이 

정말 내가 편안히 느끼는 나만의 온전한 공간에서 이렇게 진실되게 진심 어린 눈빛으로 물어보다니.


당연하지.


나의 "Yes." 답변 하나에 남자친구에서 약혼남으로 레벨업이 된 그와 여자친구에서 약혼녀로 레벨업이 된 그녀.

말 한마디가 인생을 바꾼다는 게 정말 이런 거구나.


반지를 끼워주면서 그때의 약혼남은 내게 말했다.


이 반지는 우리 집 가보야. 원래는 엄마의 할머니 거였대.
토파즈인 이유는 그분 눈 색깔이 딱 이 색이었다.
오래되어서 큰 스크래치도 있고 너한테 많이 클 거야.
엄마가 이제는 네꺼니깐 너 마음대로 고쳐도 된다고 했어.


그렇지만 나는 아직도 그 반지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스크래치도 내게 큰 사이즈도 나는 그 반지 그대로가 소중하다.

분명 나는 모르는 사랑하는 두 분의 이야기가 그 스크래치에, 그 사이즈에 담겨 있겠지.

그리고 투박하지만 꾸밈없이 진심으로 가득 찼던 남편의 프러포즈에 어울리는 반지는 

어느 정도 세월의 때와 사연의 무게를 지닌 반지라고 생각해서 더욱더 그대로 남겼다.


그렇게 반지를 받고 나서 나는 바로 부모님께 영상 통화를 걸었다.

행복해야 할 일인데 왜 부모님을 보자마자 눈물이 났을까.

그런 나를 보고 엄마도 울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는 그때 정말 우리에게 다가온 현실이 겁이 났겠지,

이제는 내가 한국이 아니라 저 먼 미국에서 가족과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현실.


약혼남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사람과의 결혼이 아니면 생각조차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가족과의 이별에 심적, 감정적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내가 살게 될 곳은 미국이니 현실적으로 가족은 정말 일 년에 한 번 밖에 못 보겠다는 생각이 나를 집어삼켰다.

반지를 자랑하고 마냥 기쁨에 넘쳐 있어야 할 예비 신부가 꽤나 자주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약혼남의 마음에 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자신과의 결혼 때문에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나의 상황과 슬픔에 본인이 해줄 수 없다는 게

아니, 오히려 본인이 그 슬픔을 만들어낸 장본인인 것 같다는 생각에 내 약혼남은 마음이 편치 않아 했다.

물론 그걸 숨기려고 했으나 사랑하는 나를 속일 수는 없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마음이 찢어지게 아팠고 할 수 있는 건 빨리 적응할 거란 말과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다.

약혼남은 미안해하지 말라고 했으나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나 때문에, 나를 돕고 싶은데 돕지 못하는 무능감에  힘들어하는 모습은 지금 다시 생각하여도 마음 아프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가족 모두 적응해 갔다.

어차피 자식은 언젠가는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존재이니

그냥 나는 또래 사람들보다 조금 더 빨리 하게 됐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와 살아가겠다고 떨어지는 건데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지금도 당연히 가족이 그립지만 무엇보다 나는 남편 덕에 하루하루가 즐겁다.


잠에서 깨서 비몽사몽한 채로 침대 위에서 몇 분 껴안고 있다가 시작하는 아침이,

아무리 더워도 손 꼭 잡고 산책하는 오후의 그 짧은 시간이,

다른 공간에서도 서로를 생각하면서 보내는 시간이,

부리나케 집에 돌아와 서로에게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는 저녁이,

오피스에서 같이 공부하다가 갑자기 서로 장난치면서 노는 우리만의 시간이,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 서로 다리를 맞대고 각자 책을 읽다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밤이

나는 좋다.


남편이 아니었으면 내 인생이 이만큼 즐겁고 재밌었을까 싶다.

남편이 아니었으면 누가 나를 이렇게 매일 웃게 할까 싶다.

남편이 아니었으면 가슴이 아리는 슬픔과 한없이 무거워지는 내 우울을 누가 감당할 수 있었을까 싶다.

남편이 아니었으면 누가 이 복잡하고 예민한 고집쟁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서 사랑한다고 해줄까 싶다.


그런 나의 남편에게,

네가 아니면 안 되는 내 남편에게,

내가 내 손으로 선택한 나의 love of my life에게

결혼식에서 바친 나의 서약을 다시 한번 바친다.




As you know, I am stubborn.


I came to the states giving up many things and even people to achieve my goal.

I might look crazy to some because how much could a goal mean to a person that she flies continents away from her family?


Well, it wasn’t easy.
As you know there were many days and nights with red eyes and a mountain of tissue balls.


You had to calm me down because I was missing my family so much.

You would put me in your big strong arms and hold me tight.

You would tell me to “just cry it out, don’t hold it in.”

But, while you were taking care of me, I would glance your face with a bit of sadness.


One night, you said to me with tears running that you sometimes feel guilty because I had to give up my family to be with you.

That ached my heart.

I never wanted you to feel that way because I chose you.

I didn’t choose you over my family or life in Korea. I just chose YOU.


I chose you because I love you so much.

I chose you because I want to spend the rest of my life with you.

I chose you because you make me feel safe and happy.

I chose you because I want to be ALWAYS there for you as a feisty chihuahua who will yelp and attack when her man gets mistreated.


I chose you, and now WE have two loving families that love us both dearly.

So, I thank you.

I thank you for being a part of my crazy family, and I thank you for giving me another crazy family.


As I said in the  beginning, I am stubborn.

It probably won’t change because even my parents who raised me for decades have failed.


But, because I am stubborn, I will be stubborn to be by your side no matter what.

Most of all, I will be stubborn to love you, alw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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