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할아버지는 그 어렵던 시절 서울대 법학과를 나오셨다. 아마도 마을 입구에 < 서울대 법학과 합격 전 OO > 이런 현수막이 걸렸을 것이고, 시끌벅적 마을잔치도 열렸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누구라도 고학력자인 할아버지와 잘 나가는 "전"씨 집안에 시집을 가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해보며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려 본다.
할아버지는 "신"씨 가문의 우리 할머니를 만나 결혼을 하셨고, 5명의 아들과 2명을 딸을 낳았다. 그중 2명의 딸(나의 고모들)은 첫돌을 다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제대로 장사를 치르지도 못하고 항아리에 넣어 묻었다. 남아있는 5명의 아들 중 첫째 아들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을 한 뒤 오빠(장손)와 '나' 이렇게 1남 1녀를 낳았다. 그리고 둘째 아들(작은아버지)도 2 남만 낳다 보니 그래서 그런지 할아버지는 유난히도 하나밖에 없는 손녀인 '나'를 많이 예뻐해 주셨다.
할아버지는 손자, 소녀들에게 늘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다. 아무래도 한자로 공부를 하셨던 할아버지는 한자를 중요하게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벽에 걸린 커다란 달력이 한 달을 채워 끝이 나면 할아버지는 지나간 달의 종이를 부욱 찢으셨다. 그리고는 손자, 손녀들을 앉혀놓고 달력의 뒷면에 멋진 글씨체로 하늘 천(天), 땅 지(地), 검을 현(玄), 누를 황(黃), 집 우(宇), 집 주(住), 넓을 홍(弘), 거칠 황(荒)... 천자문을 써 내려가셨다. 그러면 오빠들은 공부를 하기 싫어서 도망을 갔지만 '나'는 고사리 같은 손에 연필을 꽉 지고 끝까지 한자를 열심히 따라 그렸다. 가족들 이름도 한자로 쓰게 가르쳐 주셔서 할아버지 이름, 할머니 이름, 아버지 이름, 엄마 이름, 그리고 내 이름까지 반복해서 쓰다 보니 자연스레 온 가족의 이름을 한자로 쓸 수 있는 국민학생이 되었다. 그렇게 할아버지와의 천자문 공부시간이 좋았던 '나'는 커다란 달력이 찢어지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함께 천자문을 공부하던 그 시간이 너무 재미있었고 행복했다.
할아버지는 "전"씨 집안의 절대 권력자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의 사랑을 등에 업고 기세등등 오빠들에게 대들었다. 그래서 오빠들과 종종 싸움이 일어났지만 할아버지의 한마디면 오빠들은 나에게 와서 모두 잘못을 빌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빠들은 할아버지께 천자문을 배우는 것을 싫어했지만 '나'는 좋아했으니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커져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남독녀 외동딸은 아니었지만, 아들 5명에 손자가 3명 뒤로 유일한 여자아이라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할아버지는 그런 나를 언제나 무릎에 앉히곤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꼬옥 안아주셨다. 세 명의 손자들(오빠와 사촌 오빠 2명)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지만, 그럴수록 '나' 할아버지의 차별적인 손녀 사랑 덕분에 의기양양해졌다. 하지만 할머니는 아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손자들(특히 장손!!)을 예뻐하셨다. 미래의 일은 예상할 수 없어서 할아버지 '라인'에 줄을 섰던 나의 세상은 10년 뒤에 끝이 났다.
'나'의 태평천하는 내가 10살이 되던 1월에 끝이 났다. 할아버지는 60세의 나이로 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가끔 레트로 느낌이 나는 가게를 가게 되면 벽에 그 시절의 커다란 달력이 걸려있는데 '나'는 숫자가 큰 그 달력만 보면 달력을 부욱 찢어 뒷장에 아주 멋진 글씨체로 천자문을 가르쳐 주시던 할아버지 생각이 난다. 할아버지의 손녀 사랑 덕분에 그 손녀는 천자문을 배울 수 있었고 학교에서는 한자 부장을 도맡아서 칠판에 한자를 쓰곤 했다. 지금도 천자문을 외워보라고 하면(쓸 수는 없지만..;;;) 입에서 술술 외워진다. 역시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 최고인가? :)
많이 짧기만 했던 할아버지와의 추억은 천자문밖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아들들만 가득했던 '전'씨 집안에 하나밖에 없던 손녀가 할아버지 눈에는 얼마나 예뻤을까? 게다가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천자문 공부시간을 좋아했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손녀'였을 것이다. 비록 할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은 10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듬뿍 주셨다. 할아버지 덕분에 '나'는 따스한 온기와 사랑의 눈빛을 알게 되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면 할아버지가 주셨던 사랑을 떠올려본다. 그러면 미리 받아두었던 사랑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면 되니까. 오늘은 오랜만에 천자문책을 꺼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