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다 비슷하겠지만
불행한 가정의 모습은 지극히 사적이며
다양한 모습을 띤채 불행속에 잠식되어간다.
나의 부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최대한 미루고 싶은 숙제처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그러나 내가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해야만하고 끝내야만 하는 숙명적인 일이다.
아빠는 중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결혼후 힘든 노동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내가 태어나자 마자 아빠는 친엄마와 이혼을 했고
힘든 노동일을 끝내고 술에 흠뻑 취해 집에 들어오는 날에는
앞으로 다가올 일이 불보듯 뻔히 그려지기 때문에
내 심장은 요동을 치기 시작하며
온 몸은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빠는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짐승이 포효하듯
온몸으로 절규하며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며 새 엄마와 싸웠고 집안 살림은 순식간에
아작이 났으며
어떤날은 다 죽자며 부엌칼을 들고 위협을 하다가
칼을 던져 방문에 그대로 꽂은적도 있었으며
그때 당시 우리집에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는데 강아지도 집어 던져서 그 뒤로 강아지는 우리 아빠를 보면 아연실색하면서 도망 다녔다.
이런일은 아빠가 술만 마시면 일어나는 일상이였고
아빠는 무언가에 미쳐있지 않으면 당장 죽을 사람처럼
알콜에 미쳐서 살아갔다.
한번은 아빠가 낮잠을 자고 있는데 내가 방문을 닫다가 바람에 의해 꽝하고 큰 소리가 나자
자기 자는데 잠을 깼다고 대 걸레를 들고 당시 18살이였던 나를 때리려고 쫓아와서
나는 맨발로 13층에서 1층까지 계단을 순식간에 뛰어서 내려온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누군가 나를 이 지옥속에서 꺼내주길 간절히 바랬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이 집에서 당장 나가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다혈질 아빠의 폭언과 폭행속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나와 오빠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 모든 시간들을 온전히 감내하며 살아갔다.
결국 오빠는 불행의 굴레를 더는 버티지 못하고 가출을 해서 고등학교를 자퇴를 했고
같이 살았던 새언니도 고등학교를 가출을 했고 나중에 일찍 결혼을 했다.
이 언니는 현재 과거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해
우울증에 걸려서
부모와 오랜시간동안 연을 끊고 살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어릴적 아빠의 모습은 일이 없을때는
어두운 방구석에 들어가
팔을 이마에 올려놓고 하루종일 누워있는 모습이였다.
아빠는 수시로 나에게 물을 떠오라고 했고 다리를 준무르라고 시켰다.
그럼 나는 아빠 비위를 맞추려고 언제나 쪼르르 달려가 기쁜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아빠 다리를 준물어 드렸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아빠와 나는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았다.
아빠는 자신의 삶이 너무 힘드니 딱히 자식에게 관심이 없으셨다.
아빠의 역할은 오로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입혀주고 먹여주는 걸로 충분히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거 같았다.
사랑이나 관심, 칭찬 같은 이상적인것들을 바라는건 우리에게 사치였다.
아빠와 나는 서로 존재하지만 투명인간처럼 서로에게 말을 잘 건내지도 않고 질문도 하지 않았다.
과거를 떠올려 보면 언제나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우린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는 순간들은 별로 없었던거 같다.
같은 공간속에서 다른 생각을 하며
각자의 삶의 무게로 버거워하면서 서로에게 관심조차 없이 살아갔다.
아빠에게 칭찬은 받아본적 없었고 질책은 수없이 받아봤다.
내가 학원을 운영할 때도 이래저래 힘들다고 말하니
너는 어렸을때부터 팔자가 사나워서 그렇게 고생하면서 산다면서 오히려 나를 더 다그쳤다.
아빠의 노동일은 수입이 일정하지 않아서 생계를 유지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도 수업료를 못내서 뒤에 서 있는 일도 종종 있었으며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도 나는 친구들에게는 가기 싫어서 안간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차마 아빠한테 수학 여행비를 달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당시 부모님은 분식점을 했지만 잘 되지 않아
결국 가게를 처분했고 아빠는 그 뒤로 경비일로 취직을 하시게 되었다.
우리집에서는 유일하게 나만 대학을 갔는데
대학을 갔을때도 어느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새언니들 오빠에게 나는 욕심 많은 유별난 아이였으며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고
부모님은 내가 대학 갔다고 돈이라도 보태달라고 할까봐
전전긍긍하며 늘 그렇듯 날 애써 외면했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학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하는지 관심조차 없었고
대학생활 내내 돈 한푼 보태준적 없었다.
늘 그렇듯 스무살 이후 나는 이미 내 스스로 나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능숙하게 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학원 강사, 과외, 호프집, 커피숍, 휴대폰 대리점등 다양한 일을 하며
학업과 일을 병행하며 대학 졸업장을 따기 위해 숨가쁘게 살았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건 가난이 아니라
내가 힘들었을 때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게 날 너무 서럽게 만들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뼈져리게 느꼈다.
우선 당장 내가 오늘 죽더라도 날 위해
눈물 한방울 흘려줄 사람이 내게 있을까?
가족은 나에게 더이상 가족이 아니였다.
새 엄마는 본남편에게 낳은 딸 셋과 아들 하나가 있었다.
두 딸은 이미 시집을 갔으며 고등학생인 딸과 아들이 있었다.
내 나이 여덟 살때 우리 집에 와서 막내딸을 데리고 같이 살게 되었다.
난폭한 아빠를 만나서 마음 고생하는걸 아는 나는 새 엄마에게 미안해서
항상 새 엄마 눈에 들기 위해 애를 썼는데 아빠가 술마시고 난동을 피울때마다
새 엄마는 울면서
" 내가 어쩌다 너의 아빠같은 사람을 만나서 내 새끼들 찬밥 먹일 때 너희들 따뜻한 밥 해먹이고 너희들 키우느라 내 새끼들은 서럽게 자랐다.
게다가 너의 아버지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생때같은 내 아들이 물에 빠져 죽었다."며
매번 나에게 신세한탄을 하셨고 그때마다 어린 나는 죄책감에 몸둘바를 몰랐다.
사실 물에 빠진것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물놀이를 하다가 죽게 된건데
이 모든 불행의 시초는 너의 아빠랑 살면서 일어난 일이니
너희들이 내 인생을 책임지고 보상하라는식이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새 엄마의 말에 세뇌를 당해 아빠 때문에 우리 때문에
엄마 인생이 망가졌으며 나는 그 빚을 갚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한 스무살때부터 적지 않은 용돈을 드렸고
결혼을 한 이후에도 다른 자식들보다 매달 용돈을 넉넉히 드렸다
명절때나 생신때가 돌아오면 추가로 돈을 더 드렸고 맛있는것도 사드리고
병원에 입원을 했을 때도 병원비에 보태쓰라고 큰 돈을 보내드렸고
언니, 오빠들과 돈을 모아 칠순잔치도 해드렸다.
하지만 아빠와 엄마는 나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나 컸다.
물질적인것 뿐만 아니라 애교 많은 딸 노릇까지 원했다
조금만 서운하게 하면 싸가지가 없다느니 부모한테 살갑지가 않다느니
너처럼 무뚝뚝한 딸이 어디있냐며
불만을 자꾸 토로하셨고 본인들이 바라는대로 해주지 않으면 전화기에 대고 막말을 하셨다.
사실 나도 할말이 없어서 말을 안하고 참고 있었던건 아니였다.
본인 딸들은 애를 낳으면 산후조리도 해주고 이사나 무슨 일이 있으면 조르르 달려가 집안일도 도와주고
둘째딸은 일하느라 바쁘다면서 2년동안 손주를 직접 키워주기도 했다
반면 나한테는 애 낳다고 조리해준적도 없고 김치를 담아서 준것도 아니고 나 일한다고 내 딸들을 돌봐준적도 없으면서 자식이 나만 있는것도 아닌데 대우는 다른 자식들한테 못 받은 대우까지 해달라고 하니
나로써는 어이가 없었다.
한번은 전화를 받자마자 인사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생활비가 똑 떨어졌으니 지금 당장 돈을 보내라는 것이였다.
병원에 입원하면 다른 자식들한테 전화하는게 아니라 나에게 맨 먼저 전화해서
돌려가며 병원비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결국엔 나에게 병원비를 보태라는 것이였다.
새 엄마의 이론에는 내가 친자식이 아닌 너를 거뒀으니 그에 상승한 보답을 해야된다는 것이였다.
나의 친오빠는 집에 유일한 아들이여서 아파트를 담보로 잡아 카드빚도 갚아주고
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며 치켜 세워주면서
나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차별당하며 살아왔는데도 제일 많이 바라는 자식은 나였다.
내가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고 다른 자식들보다 풍족하게 사는거 같아서
비빌 언덕이라고 생각했던지 유독 나에게 바라는게 많았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자식들보다 잘 사는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아니였다.
오히려 질투를 하며 자기 딸들이 용돈을 이렇게 보내주고 손주들이 이렇게 똑똑하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렸을때야 엄마의 말이면 죽는 시늉까지 했던 나였지만
세상을 알고 난후에는 더이상 착한 호구짓을 그만하고 싶어
부모님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문자며 받을때까지 끊임없이 전화를 해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엄마였다.
" 내가 내 자식 버려가면서 너 키워줬는데 은혜를 모르고 배은망덕한 년, 천벌 받을년
니가 내 덕에 대학 나왔지 나 아니였으면 대학이라도 나왔을거 같냐?."라고
욕을 하셨고 그 다음은 아빠가 전화해서는 니가 크면 나한테 효도할 줄 알고
고아원 안보내고 키웠는데 니가 나한테 싸가지 없이 이럴수 있냐며 소리를 질렀다.
그 전화통화이후로 나는 부모님에게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정이 다 떨어졌고
그 뒤 한동안 연락을 안하고 지내다가 딸들 보는 눈도 있고
그래도 자식된 도리로 할일은 하자하며
명절 때 찾아가서 맛있는것을 몇번 사드리고 왔다.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서 한일이 아닌 의무감으로 한일이다 보니
부모님 얼굴을 보고 있으면 과거 일이 떠올라서 화가 치밀어 올랐고
갔다오고 나면 마음의 병이 생겨서 며칠동안 우울감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상태로는 서로 얼굴 보는게 무슨 의미일까 싶어서
연락을 당분간 끊고 지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게 사실 당분간이 될지 계속 이어질지는 장담할 수 없다.
아빠를 아예 이해를 못하는건 아니다
나이를 먹으니 아빠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도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거의 고아처럼 자랐고
배움의 끈이 짧아 능력도 없는데다 부양해야하는 가족은 많고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빠의 수준에서는 그게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할수도 있다.
아빠의 폭력성으로 내가 힘들었다고 말하면
아빠는 자기가 뭘 그리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며 자신도 억울하고 피해자라고 말씀하셨다.
아빠의 세상은 딱 그만큼이였다. 더는 변할수 없는
머리로는 아빠를 어느정도는 이해할수 있었지만
내 마음의 상처는 내 머리와 따로 놀아
쉽사리 아물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단칼에 인연을 끊고 살고 싶다가도
그래도 낳아준 부모인데 이러면 안되지 않아?라는
양가감정으로 몇날 며칠을 혼자 힘들어했다.
하지만 결국 난 내가 살기 위해서 부모님과 헤어질 결심을
한다
"아빠 저를 버리지 않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빠 얼굴을 보면 아빠가 과거에 했던 폭언과 폭행들이 떠올라
내 마음이 너무 힘드니 제 마음이 괜찮아질때까지는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건강하시고 제가 행복하게 살기를 빌어주세요 ."
라는 문자를 저장해놓고
적당한때에 보내려고 한다
내 마음이 아빠에게 닿을수 있을까?
우리의 헤어짐은 이루어질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