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호구는 되기 싫어
거절 못하면 거절당한다.
나는 누군가 나에게 부탁을 하면 거절을 잘하지 못하며
어쩔 수 없이 거절을 했다해도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몰라하는 성격이다.
누군가 나에게 옷차림이나 머리 헤어스타일이 별로라며 지적을 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좋아서 하는 거야 네 스타일도 별로거든."이라며
맞받아치는 건 고사하고 집에 가서 내 옷차림이나 헤어 스타일이 그렇게 별로인가
셀프 점검을 다시 한 다음 그 스타일을 다시는 하지 않는 소심한 답답이다.
스물여섯, 속도위반으로, 만난 지 십 개월 만에 동갑인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했다.
좋아서 한 결혼이라지만 서로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채 한 결혼이었고 동갑인 데다
성향이 너무 다른 둘이 만나 결혼생활 처음 삼 년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술과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남편은 일주일에 오일 정도는 술을 마시곤 했는데
밖에서 술을 마시면 마지막 코스는 항상 우리 집이었다.
전화를 미리 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도 아니었다.
미리 연락이라도 해줬으면 안주거리라도 사놨을 것이다.
남편의 그런 예의 없는 행동에도 나는 당황한 내 감정 따위는 신경쓸 겨를도 없이
상황파악 못하고 무작정 들이닥친 사람들이 당황한 내 표정을 보면 오히려 더 민망해할까 봐
친절한 미소를 머금고 집안을 싹싹 뒤져 안주거리를 찾은 다음 과일은 공을 들여 깎아서 예쁜 접시에 내놓고
있는 재료로 머리를 쥐어짜 뚝딱뚝딱
맛있는 안주를 만들어 내놓곤 했다.
투덜투덜해도 사람들이 오면 친절하게 맛있는 안주를 제공하는 와이프를 자랑하고 싶었던 건지, 내가 이렇게 대우받고 산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건지,
본인 군 생활하는 동안 10년 가까이 이런 행동 패턴은 반복되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우리 집은 술판이 벌어져 있어고
나는 일을 끝났어도 쉬지 못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아이를 돌보면서 술상을 봐주거나 뒷정리를 해야 했다.
어느 날 나는 남편에게 "십 년이 다 되는 세월 동안 자기가 직장 동료 데리고 오면 일하고 와서 피곤한데도 술상 차려주고 , 치우고 , 자기 술버릇 다 받아줬는데
나한테 고맙지 않아?"
당연히 기대에 부응하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 예측하고 넌지시 물어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대답 없는 적막뿐이었다.
'그동안 나 때문에 고생 많았어 고마워' 이 한마디면 나의 희생이 눈 녹듯 사라졌을 텐데.....
원래도 무뚝뚝하고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인줄은 알았지만 내가 그렇게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며 싫은데도 참고 해줬는데 적어도 고맙다고는 말할 줄 알았다.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만 놓고 차마 배출하지 못했던 극도의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한 단어가 불현듯 떠올랐다
' 착한 호구.... 그래 난 너한테 착한 호구에 불과했구나!'
친구들을 데려와도, 친구들이 술 마시다 잠이 들어 집에서 자고 가도 다 알아서 잘 챙겨주니까
이 사람은 원래 다 이해해 주는 그런 사람이니까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마운 생각도 딱히 들지 않는
나는 그에게 착한 호구 즉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이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십 년이 되는 시간 동안 남편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했는데 나의 고생을 알아주지도 않고
그에 상응하는 보답이 없자 배신감이 들면서
긴 세월동안 바보같이 산 내가 너무나 미련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내 마음속을 곰곰이 들여다보니
이런 상황을 만들건 다 나의 잘못이였다.
남편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았고 큰 충돌을 만들어서 집에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내 마음이 컸던 것이였다.
이혼가정에서 자란 나는 그 설움과 불행을 낱낱이 알고 있었기에 내 아이에게 그 슬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속도위반으로 일찍 결혼해 남들의 우려가 컸던만큼 보란듯이 잘 살고 싶었다.
내가 이런 일로 자꾸 싸우면 남편이 날 싫어하고 미워할테고
그려면 나는 쓸모 없어지게 되며 결국엔 헤어지게 될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다.
결국 난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아 싫은 소리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겁쟁이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이런 일방적인 양보와, 인내는 관계를 개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이런 방식을 계속 유지할 경우 상대방에게는 더욱더 뻔뻔하게 나의 권리를
침해해도 된다는 신호를 준 셈이 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남편에게 나의 속 마음을 솔직하게 말했고
앞으로는 나의 동의 없이는 사람들을 집에 데려오지 말고
술은 나가서 먹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나의 친절함과 호구짓에 이미 길들여져
행동수정이 어려운 남편은
그 이후에도 똑같은 행동패턴을 보였고
그때마다 나는 미소를 머금는 대신 냉소를 머금었고 안주를 내주기에 분주했던 내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으며 소파에 가만히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집에 자주 왔던 손님들도 달라진 나의 태도에 당황한 듯 보였고 남편 또한 나의 태도에 어이없어했다.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방문한 사람들은 서둘러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조용한 그 집에는 싸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 사건 이후로 남편은 더는 사람을 집으로 불러들이지 않았고 내 눈치를 전보다는 쪼금 더 보는 듯했다.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착하게 대하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답으로
되돌려줄 거라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상이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사람한테 배신감을 느꼈다.
오히려 나의 배려나 친절함을 다른 사람들은 아예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었고
안다고 할지라도 고마워하기는커녕 그것을 악용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살다보면 때로는 듣기 싫은 말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원치 않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삶을 살수 있다.
남을 위해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거나 나를 지나치게 낮출 필요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출 필요도 없다.
필요하다면 내 자신을 위해 싸울수 있는 까칠함도 장착해야한다.
적어도 착한 호구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