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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스무살

by 박진영

상식이라는 말은 쉽다. 상식을 자주 운운하는 사람은 자신이 꽤나 명철하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많은 부분을 간과하고 거칠게 사유한다. 아니 그들은 사유라는 것을 하지 않는다. 상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은 통념에 따를 뿐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다. 그들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통념 또한 그들의 통념이지 모든 이가 동의하는 통념도 아니다. ‘나’의 상식과 ‘너’의 상식이 다를 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기를 포기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노력했다고 하지만 오래 노력하지 않는다. 그렇게 각자의 상식이 부딪히고 몰이해가 동반될 때 각각의 상식은 서로를 혐오하기도 한다.

장고,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길까 봐 걱정된다. 물론 현재의 상황 안에서 이뤄지고 있는 특정 장고를 내가 긍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회 전반적으로 형성되는 어떤 분위기는, 대체로 어떤 사건을 예로 들면서 그 밖의 모든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퍼진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 장고를 했는데, 그게 본인의 상식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지금 혹은 미래에 있을 어떤 사건에서 장고를 한다면, 그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비난하는 기조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기우일 수 있다. 하지만 시대나 문화는 특정한 사건 하나를 통해 쉽고 빠르게 변해서 오랫동안 우리 안에서 상식처럼 작용하게 되기도 한다.


상식이라는 말은 쉽게 고민하지 않고도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 다수의 구성원이 동의하며, 또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말한다. 이것은 철저히 내부와 외부를 나누며 피아를 나눈다. 상식을 깬다는 건, 내부를 깨고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이며, 외부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내부에게 배척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부는 안전하다. 내쳐지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안전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안에서의 사유이기 때문에 분명 보지 못하는 것(외부)이 생긴다.

나 또한 무의식적으로 많은 상식과 통념에 둘러싸여 있는 사람으로서, 그런 것들을 경계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안 될 때가 많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우리 바깥의 것들을 쉽게 혐오한다.


이처럼 우리 안에는 우리가 살아오면서 굳어져온 다양한 것들이 있는데, 굳어져왔다는 표현이 인상 깊기도 한 게, 굳어졌다는 건 더 이상 그러한 부분에 예민하지 않다는 것이고, 예민하지 않다는 것은 거기에서 더 느낄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으며 오랫동안 마찰을 겪었지만 이제는 무감각한 것이 되었으며 또 이제는 유연하게 되지 못하며 외부의 것을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것, 그러니까 굳어진 것을 조금 녹이거나 깎았을 때,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 생각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


가령 우리가 처음 했던 것. 그러니까 내가 처음 했던 것 중에 하나 떠올려보자면 수영과 운전이 있다. 수영을 처음 배우던 스무 살 때에는 물 안에서 내가 느끼는 감각과, 물살을 가르는 기분, 그러는 와중에 본 것과 떠오르는 것들이 모두 인상적으로, 조금 과장해서 ‘시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물속에서 호흡을 하는 방식을 배울 때, 어떻게 해야 더 물을 잘 탈 수 있는지를 배울 때, 수경을 쓰고 수영장 바닥 타일을 볼 때, 거기에 비춰오는 햇살, 물빛들을 볼 때, 그 모든 게 선명하고 또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수영을 한다면 그것은 그저 행위와 반복이지 그때의 그런 감각들은 이제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기억하려고 하면 지금처럼 기억할 수 있다. 느끼려고 노력한다면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억과 노력이지 생생한 현재의 감각은 아니다. 올해는 신춘문예 당선작 중에 유난히 수영에 대한 작품들이 좀 있었는데, 그걸 읽으면서 ‘아 그때 내가 그랬지’, ‘맞아, 이런 게 있었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 ‘왜 지금 나는?’하는 생각이 들었다. 운전도 그렇다. 초보운전 때는 당시 경험하고 배우던 모든 것들이 인상 깊고 시적이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냥 한다. 걷듯이 움직인다. 때로 욕도 한다.


첫 직장을 얻고 1년이 흘렀다. 이제는 적응을 해서 일하는 게 아무렇지 않다. 적응할 필요도 없다. 적응을 하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두렵지만, 새롭다. 적응을 하는 동안 존재는 진화한다. 생물학적이거나 세대 전반의 진화를 얘기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새로운 것에 적응을 해나가면서 변화하고 또 습득하며, 새로 느끼고 이전의 나와는 일정 부분 다른 존재가 된다.


스무 살, 은 이제는 내게 10년이나 지난 것이다. 기억에도 없는 영아 시절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삶에서 오는 수많은 자극들과 적응해 나가야 할 수많은 것들이 나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을 것이다. 그 순간의 감각들은 대단히 선명하고, 선명해서 날카롭고, 날카로워서 우리를 파고드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어쩌면 많은 부분 ‘굳어’ 졌다.


순수, 하다는 말이 예전에는 부정적인 말로 들리곤 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쉽게 흔들리며, 쉽게 더럽혀질 수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은 어느 정도는 순수해야 한다. 순수해야 외부를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의연한 사람이 되는 게, 고통받지 않는 걸 원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그래도 태어났으니까 세상을 보다 온전히 느껴보고 싶다. 물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나 시련 앞에서는 무너지거나 겁먹을 수도 있겠다. 그런 걸 바란다고 감히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평생을 순수하게 살고 싶다는 말은 할 수 있고, 또 하고 싶다. 나는 이제 스무 살이 아니지만, 스무 살에 느꼈던 것들을 오랫동안 감각하고 싶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어리석고, 또 치기 어린것들이지만 그것들을 감히 어리석고 치기 어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더 나은 선택과 더 나은 생각을 할 수는 있었겠지만, 내가 해온 오답들 때문에 지금의 내가 굳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계속해서 틀리더라도 상식이나 통념 안으로 숨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온전히 살아있었던,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때가 그립다. 그리우니까 그리워질 것으로부터 더 멀어지지 않으려고, 또다시 돌아가려고 노력해보고 싶다. 물론 나는 현재를 사랑한다. 현재를 사랑하니까 현재를 더 더듬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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