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자신이 느낀 감정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역지사지라는 것도 의식적으로, 또 부단히 노력을 해야만 이루어지는 작업이기도 하다.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것도 때로는 의식적으로, 논리적으로만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너의 그 마음/상황에 공감/이해해’라는 말은 조금은 공허한 면이 있다. 그래도 말이라도 어딘가. 그 말에 굳이 파고들 필요는 없다. ‘나’의 감정을 ‘너’가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일정 부분 환상에 기댄 측면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떤 것 같은데?’라는 질문은 집요한 측면도 있다.
어떤 사람 둘이 있다. 똑같은 시공간 안에서 똑같은 사건을 맞이했을 때, 그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같을까? 둘의 생각과 선택이 같을까? 대체로 다르다. 같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100% 같지 않다. 그게 인간 사회가 갖는 갈등의 수많은 양상 중 하나이며, 또 문명이 발전해 온 방식이기도 하다. 때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군중이 되어 같은 목소리를 낼 때도 있지만, 그 안에서도 그들의 느낌은 수만 가지이며, 그들의 삶 또한 당연하게도 수만 가지이다. 사건이 끝나고 나서 그 사건을 회상하는 사람들의 기억, 인식, 감정 또한 수만 가지이며 어떤 것은 실제와 다르고 어떤 것은 실제와 비슷하다. 그리고 각자 느끼는 감정을 서로 온전히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비극이기도 한데, 또 한편으로는 다행인 일이기도 하다. 모두가 하나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는 사회는 섬뜩한 면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공감해 주기를, 온전히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그 감정이 작은 것이라면 묻고 넘어갈 수 있지만 그 감정이 큰 것이라면? 자신의 삶 전체를 뒤흔들만한 중요한 사건이라면. 혹은 그 감정이 복수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면?
공감받기 위해, 혹은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 방식이 긴 이야기일 수도 있고, 당시의 재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끝내 그 사람은 성공할까? 아니, 그들은 대체로 실패한다. 하지만 엇비슷한 감정을 전해줄 수는 있다. 거기에서 만족하고 끝낼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공감과 이해를 갈구하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매달릴 것인가?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후유증이 가실 때까지 타인에게 공감을 갈구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어떤 후유증은 그 사람의 삶이 끝날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그 사람의 삶의 비극이다. 그 비극은 타인에게까지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무덤에 들어간 이야기, 감정들이 많을 것이다.
여기까지는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고 조금은 흔한 이야기다. 하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이런 것이다.
다른 시공간에 있는 사람, 전혀 다른 사건을 겪는 사람이 서로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일도 있다는 것. 부단히 노력해 만들어낸 설명이나 이야기, 재현 없이도 문득 어느 순간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때 느낀 ‘나’의 감정이 ‘너’의 감정과 같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나’ 또한 ‘너’의 감정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 설령 ‘나’가 그렇게 느껴 ‘너’에게 설명한다고 해도 ‘너’는 ‘나’의 감정이 엄연히 보자면 ‘너’의 감정과 같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서울에 있는 A가 A’라는 사건을 겪고 a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다른 시간 다른 공간,
런던에 있는 B는 B’라는 사건을 겪고 a라는 감정을 느꼈다. 그 둘은 서로 만날 수는 없지만 다른 시공간 안에서 두 사람의 감정이 서로 맞닿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감히 특정 지어 호명할 수는 없지만. 어떤 죽음 앞에서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낄 수는 없어도, 어느 순간 다른 죽음을 통해 어떤 죽음에서 일어났던 어떤 감정을 비슷하게 느끼는 일도 있을 수 있다.
‘너’는 왜 ‘이 사건’에서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냐고 호소할 수 있다. 하지만 ‘너’가 ‘이 사건’과는 전혀 다른 사건을 통해 ‘나’의 감정과 함께 했다는 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지나갈 수 있다. ‘나’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 삶 안에서 어떤 감정의 연대, 감정의 공동체가 보이지 않게 형성이 되는 순간이 있다.
조금 붕 뜬 발언이지만, 어떤 감정 하나를 품고 외로워한 적이 있다면, 외로워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건 안에서 ‘나’의 감정을 ‘너’가 온전히 공감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은 ‘나’ 혼자만 느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감받지 못하는 사람은 외로워지고, 그래서 사회와 멀어지기도 한다. ‘나’의 감정을 타인들이 온전히 느껴주길 바라는 것은 사실 욕심이다. 어쩌면 복수심과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계속 함께 걷는다면, 이해받지 못한다고 떠나지 않고, 자꾸만 매달린다고 해서 지쳐 떠나지 않는다면, 어느 순간 우리는 같은 감정 안에서 서로를 만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시공간에서, 또 다른 사건 안에서 출발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감정들이 각기 다른 위치에서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3차원 바깥의, 그러니까 결말에 다다른 우리 삶 안에서는 서로 말하지 못하고 알 수 없으며 전할 수 없지만, 맞닿아 있는 감정들이 있을 것이다.
‘너’가 A를 말해도 ‘나’는 A를 모르지만 B를 통해 A를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다르지만 같은 것이고, 그것은 사람이 모여있는 하나의 형태일 수 있다. 그러니까 지치더라도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수많은 감정들을 통해 서로 맞닿아 연대할 수도 있다. 물론 그 공감이 탐탁지 않을 수 있다. 온전히 전해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수긍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느 순간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고, 또 만난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좀 더 서로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또 매달리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