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푸르다. 날은 산뜻하고 꽃들은 향긋하다. 날씨는 사람의 감정과는 무관하다. 슬픔에 맞춰 비가 오고, 위기에 맞춰 천둥이 치진 않는다. 우연히 자신의 상태와 날씨가 맞아떨어질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이 될까.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이야 다 다르겠지만, 나는 내가 맞이하고 있던 감정이 날씨와 함께 더 깊어지곤 한다. 몸이 아프고 배가 고픈데, 날씨가 추워진다. 몸이 무겁고 하루가 버거운데 날은 습하고 뜨거워진다. 안 좋은 마음에 안 좋은 사건이 더 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공교롭다고 말한다. 이 일이 이 지경까지 될 일이 아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렇게 되었다, 혹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어떤 슬픈 마음이 슬픈 날씨를 만나면 더 슬퍼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슬픈 마음이 좋은 날씨를 만나면 마음이 조금은 괜찮아질까? 봄철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많아지는 이유는 뭘까. 죽을 기운도 없던 사람들이 죽음을 시도할 힘이 생겨서일까, 아니면 단순히 호르몬의 변화 때문일까.
어떤 기쁜 마음이 슬픈 날씨를 만나면, 기쁜 마음이 사그라들까? 보통은 그렇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기쁜 마음이 기쁜 날씨를 만나면 그것은 배가 된다. 그러니까 슬픈 마음은 어떤 날씨를 만나든 슬픈 마음이 된다. 기쁜 마음은 어떤 날씨를 만나든 어느 정도는 기쁜 마음이다.
결국에 모든 건 마음의 문제일까. 아니, 세상에는 나의 마음과 무관한 것들이 많다. 봄은 우리의 마음과 별개로 푸르고, 우리의 마음이 어떻든 간에 봄은 봄의 일을 한다. 새싹을 틔우고, 언 땅을 녹이고, 꽃을 피운다. 봄, 하면 벚꽃을 많이 떠올리겠지만 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꽃은 봄까치 꽃이다. 개불알꽃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던 그 꽃이 제법 괜찮은 이름으로 바뀐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봄까치꽃은 아주 작게, 낮은 노지에서, 요란하지 않게 어느 순간 파란 잎을 돋아낸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린다고 해서 봄까치꽃이라고 이름을 붙였다는데 크기도, 피어나는 위치도 눈에 띄지 않아 봄이 어느 정도 다 오고서야 그 꽃을 길가에서 발견할 수 있다. 봄까치꽃은 초봄에 조용히 피어나 여름이 될 무렵 조용히 사라진다. 꽃말은 ‘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천주교에 몸 담은 지 몇 해나 되었다고 ‘기쁜 소식’ 하니 사도들부터 생각이 난다. 이름도 봄까치꽃이니, 봄의 전령, 봄의 사도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다.
사도들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본다. 그들은 박해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기쁜 소식’이 있다며 사람들에게 신약을 전파했다. 새로운 약속, good news, 기쁜 소식을 각지에 퍼뜨렸다. 하느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었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쳤다는, 그리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어떤 마음들에게, 기쁜 소식은 어떻게 전해질까. 슬픈 마음에게는 기쁜 소식이 기쁘게 전해질까. 기쁜 마음에게는 기쁜 소식이 기쁘게 전달될까. 이건 모르겠다. 이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각자가 원하는 소식이 무엇이었는지, 마음에 얼마만큼의 자리가 혹은 빈 곳이 있는지에 따라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슬픈 마음 한편에 빈 곳이 있었다면 그 기쁜 소식이 그곳에 자리할 수 있겠지만, 슬픈 마음에 빈 곳이 없이 가득 차 있었다면 기쁜 소식이 들어갈 자리조차 없었을 것이다. 기쁜 마음 한편에 무언가 들어올 자리가 있었다면 더 기뻐할 수 있겠지만, 기쁜 마음이 가득 차 더 무언가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면 기쁜 소식이 들어올 자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 기쁜 소식 말고, 슬픈 소식은? 그것도 빈 공간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소식과 날씨는 외부에서 내부로 전해져야 하는 것이냐, 외부에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것이냐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소식은 외부에서 전해져 나에게 도달하지만, 날씨는 어느 순간 도래해 펼쳐진다. 조금 말장난을 해볼까. 그럼 일기예보는 어떤가? 날씨와 소식이 합쳐진 형태다. 그것이 ‘소식’이 아니라 ‘정보’에 불과할 때에는 그냥 그저 그런 것으로 흘려들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정보’가 ‘소식’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 ‘정보’와 ‘소식’은 비슷한 말 같지만 조금은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다.
내일은 맑을 것이라는 정보와 내일은 맑을 것이라는 소식. 내일은 흐릴 것이라는 정보와 내일은 흐릴 것이라는 소식. 그리고 날씨는 정보/소식과 다르게 우리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마음들은 그 날씨 앞에 서 있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외부로부터 안전한 공간에서, 또 어떤 이는 온전히 날씨를 맞아들이면서.
문득 초겨울 비를 맞으며 낡은 수레를 끌고 가던 폐지수거인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감기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그 모습이 너무 처량하고 아파서 겨울 내내 그 모습을 이따금 떠올렸다. 그때 나는 슬픈 마음이었나 기쁜 마음이었나. 그 사람도 감기에 걸렸을까. 열병, 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 열기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몸을 부들부들 떠는 그 감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