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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셈과 뺄셈

by 박진영



노트에 뭔가를 적을 때마다 항상 그 위에 날짜를 적었던 것 같다. 나중에 펼쳐봤을 때 그러한 말을 쓴 날이 언제였는지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요새는 날짜를 적지 않는다. 노트에 끄적이는 말 정도야 언제 썼나 관심도 없고, 쌓아둔 노트를 내가 자주 펼쳐보지 않는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십 대에서 이십 대 중반까지는 의미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나 부끄러울 정도로 괜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요새는 그런 것들에 오히려 인색한 편이다. 내가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사실은 대부분 의미가 없던 것이었다는 걸 겪었고, 또 어느 정도 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 법과 뺄셈 법이다.’


이전의 나는 덧셈 법에 치중 된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보자면 ‘~의 나’, ‘~한 나’와 같은 것들을 더해가면서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이런 거다.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나(예다, 나는 민트초코를 싫어한다)’, ‘비가 오면 우울한 나(마찬가지, 나는 비가 오는 날을 좋아한다)’, ‘환경 운동에 적극적인 나’, ‘불자로서의 나’, ‘포켓몬을 좋아하는 나’, ‘검사 아버지를 둔 나’ … 같은 것들로 나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럴 경우 ‘나’라고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지고, 또 다양한 것에 의미를 둘 수 있다. 어떤 것에 쉽게 반응할 수도 있다. ‘환경 운동에 적극적인 나’가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주말에는 환경 운동을 나갈 수도 있다. 환경과 관련된 모금이나 봉사에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물론 그런 자아가 없어도 가능은 하겠지만, 그런 부분을 자신의 자아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반응이 즉각적이며, 또 그런 것들을 찾아서 해나간다. 그래야만 자신의 자아의 일부분이 지켜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뺄셈 법 같은 경우에는 나를 둘러싼 어떤 부분이나 의미들을 덜어낸다. 예를 들면 ‘~의 아버지로서의 나’가 있다면 그런 부분은 진정한 ‘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덜어내는 것이다. 충격적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 육아에 지쳤다거나, 가족 공동체 안에서 ‘아버지’로서의 ‘나’ 이외에 다른 내가 없다고 느끼거나 거기에 좌절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런 것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머니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면, 정치적으로 ‘보수’인 내가 있었는데 그건 내가 아니며 틀렸던 나,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부분을 덜어낼 수도 있다. 또 ‘쉽게 울음을 터뜨리는 나’가 있는데 그건 ‘나’가 아니라며 일부러 잘 울지 않으려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아의 확장, 혹은 축소의 시도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형성해 나간다.


그러니까 나는, 요새 나를 덜어내는 중인 것 같다.

나의 어떤 한 부분에 집중하기에도 어려워서 ‘그건 내가 아니지’에 몰두해 있는 상태.

그런 시기가 주기적으로 있는 것 같다. 문득 십 대에는 당연히 ‘이게 나야’를 찾아가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갓 성인이 된 스물 초반 때도 그렇다. 내가 누구인지, 나는 무엇하는 사람인지, 내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한참 몰두하고 찾아가는 시기가 있고, 또 필요하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인 것’(사실은 자신인 것 같은 것이지만)과 ‘새로운 것’ 들을 찾아 자아에 덧붙이고, 그것을 자신이라고 믿는다.(믿는 과정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다. 그게 자신 자체라고 여기니까) 그러다가 그런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때도 있을 테다. 자신이 ‘나’라고 생각했던 어떤 부분이 지나치게 무겁고 힘들 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싫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 시기가 지나고 나면 어쩌면 ‘나’를 덜어내는 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시기는 적절히 삶에 이로울 수도 있고, 또 위험할 수도 있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을 버리거나 포기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를 덜어낸 후에, 그러니까 잔뜩 뺄셈을 한 후에 남는 ‘나’는 무엇일까? 애초에 ‘나’라는 게 취사선택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나’가 있기는 한가?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남겨둔 ‘나’는 정말 ‘나’인가?


그러고 나면 다시 ‘나’를 찾아다니면서 덧셈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나서 또 어느 순간에는 다시 뺄셈을 하고… 그런 시기들이 있다. 다만 너무 많이 더하는 것도, 또 너무 많이 빼버리는 것도 좋은 방식은 아닐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최근에 미술작품 전시기획에서 ‘문학’ 파트를 맡아서 글을 쓰는 데에 시간을 많이 쓰면서부터다. 이전처럼 대충 나만 만족하고 넘어가기는 어려웠다. 쓴다는 행위 자체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도 어려웠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기도 하고, 나름의 전문성을 기대하고 나에게 누군가 맡긴 일이기 때문인데, 아무리 써도 도저히 내 ‘글’이라는 게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그런 와중에 기획자는 ‘나’를 소개하는 파트에 나를 ‘문학 작가’로 표기하면 되는지 물었다. 그 순간 나는 싫다/좋다, 된다/안 된다, 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어떤 굴레에 빠졌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그렇게 해달라고 말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그 어떤 대답도 내릴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싫다고 말하기에는 회화작가와 협업해서 스토리텔링에 참여한 ‘나’를 그럼 무엇으로 표기할 것인지에 대한 답변이 어렵고, 좋다고 말하기에는 과연 ‘나’는 문학 작가인가에 대한 답변이 어려웠다. 글을 기똥차게 썼으면 모르겠는데 나는 내 글이 미운 상태였고, 어디 등단을 했거나 출판물이라도 있으면 모르겠는데 등단도 출판도 안 한 상태였다. 거기에 최근에 어떤 사람과 대화하는 와중에 들었던 말도 하나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직장 일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편인데, 내게 시간이 여유롭지 않냐고 물었다. 업무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지만, 나는 그 시간에 글을 써야 하고… 그래서 저녁까지 뭔가를 읽거나 골몰에 빠져있으니 바쁘다, 고 했는데 거기에 ‘그건 니 취미고’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그건 말이 심했다, 고 바로 반응을 하긴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그 사람의 그 말은 경솔했다. 그러니까 그건 예를 들면… 이직을 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자격증을 따느라 공부에 바쁜 사람에게, 그 공부를 취미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같은 예술로 치면 직장생활을 하면서 뮤지션이 되기 위해 밤낮으로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그건 너의 취미활동 아니냐, 고 말하는 식이다) 나로서는 좀 뼈아픈 말이기도 했다.

물론 글을 통해 돈을 안 벌었던 것도 아니고, 지금 얻은 직장이 내가 해온 것들과 무관하게 얻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취미’와 ‘전문’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에 이번 일이 들어왔고 나는 그 일을 하는 와중에도 내 글이 ‘취미’의 수준인지 ‘전문’의 수준인지를 계속해서 되묻게 되는 것이었다.


솔직히 어디에 낼 일이 없는 글, 돈을 받지 않는 글에 대해서는 조금 느슨하게 대했던 것도 맞다. 작년엔 이런 고민이나 자아조차 없어서 거의 절필하다시피(자꾸 파고들자면 부러트릴 펜이 있었냐도 생각해봐야 하지만) 지냈던 것도 맞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나에게는 때늦은 도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만 쉴 틈 없이 바빴다. 제대로 되는 것은 없었다. 그 사이에 출판사에 다니는 친한 형으로부터 내가 쓴 단편 소설을 웹진에 게재해보려고 하는데 소설을 보여줄 수 있냐는 요청도 왔다. 사실 작년부터 그 형은 꾸준히 나에게 그런 요청을 해왔었는데, 혹시나 발표가 되면 나중에 신춘문예나 신인상 공모에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고, 등단 과정에서도 복잡해질 수 있겠다는(신인인가 아닌가 하는 애매모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니) 생각에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이 4월이라는 건 ‘글을 쓰는 나’의 부분이 비대해짐과 동시에 흔들리는 시기였고, 그래서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소설을 보내려고 써놓은 단편들을 보니 발표되기에 괜찮은 소설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보여준다고는 했으니 보여주긴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세편을 보냈는데 그 후로 일주일이 넘게 연락이 없다. 어땠냐고 물어볼 수야 있겠지만, 괜찮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물론 쓰는 걸 멈춰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동안의 나의 태도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시기인 것 같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나는 계속 쓰고 있고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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