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늘 깨어있으라.’
자주 멍하고, 또 자주 졸아서 고등학교 때부터 늘 마음속에 새기고 다녔던 말이었다. 그쯤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었는데 그때 눈에 들어왔던 말인 것 같다. 지금이야 천주교인이고, 그 이전에는 불자이기도 했다. 내가 다녀가고 또 배웠던 종교에 대한 이야기라면 ‘종교와 나’라는 제목을 붙여 따로 더 써야 할 것 같다.
초등학교 때에야 뭔가 열렬히 하고 싶었던 것도 없었고, 학교라는 건 당연히 지루한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추측하듯 말하는 건 그때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선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또한 ‘깨어있기’를 바란 나의 근 15년 정도를 부정하는 형태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없다는 건, 그 시절의 내가 선명하지 않은 의식으로, 흘러가듯 그렇게 세월을 지나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인상적인 게 없다면 기억도 없다. 인상, 이라는 것에 대해 설명하자면 복잡해질 것 같다. 도장으로 찍듯이 내 의식에 박히는 게 인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뭐가 인상적인 것이냐, 라고 한다면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르다. 그리고 그 인상이라는 것도 그 순간에는 강렬했지만 쉽게 잊혀지는 것들도 더러 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은 굉장히 흥미로웠거나, 아니면 낯설고 새로운 것이었거나, 꼭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중요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기억하기 위해 억지로 반복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너무나 공포스럽고 두려웠던 것이라 잊히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기억은 대체로 그런 것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그 과정이 의식적이었건 무의식적이었건 간에 우리의 기억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은 우리가 살아낸 모든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안에서도 우리의 의식 혹은 무의식이 선택한 것들이다.
반복되는 생활 안에서 모든 나날을, 그 안의 모든 순간과 시간들을 기억할 수는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감정에도 경제적인 측면이 있듯이, 기억에도 경제적인 측면이 있다. 우리가 살이 찌고 살이 빠지는, 근육이 붙고 근육이 사라지는 과정 중에도 경제적인 측면들이 작용한다. 쓰지 않는 근육은 불필요한 칼로리를 소모하고, 불필요한 칼로리를 소모하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지 않으니 없앤다. 과잉되게 들어온 칼로리를 다 태우는 것은 경제적이지 않으니, 지방의 형태로 몸에 쌓는다. 기억 또한 그렇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은 경제적이지 않다. 나에게 필요하고, 또 새로운 것들은 저장한다. 반복되는 기억을 겹겹이 기억할 필요는 없다. 오늘이 어제와 같다면 오늘의 기억은 불필요하다. 오늘의 기억이 어제의 기억으로 대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 내가 지나온 한 주를 떠올려보면 기억나는 게 많이 없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건 내가 지난주와 같은 이번 주를 보냈기 때문이거나, 내 삶에 새로운 것이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억지로 기억해 내려고 하면 기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기억해 낸 것이 한 달 뒤에 내 안에 남아있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 일 년을 돌아보았을 때,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은 인상적인 기억이다. (이 ‘인상적인 것’의 성질이나 형태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초등학교 시절을 회상했을 때 많은 기억이 없는 것은 일정 부분의 사건 외에 그 밖의 사건들이 나에게 인상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다. 또 다르게 생각하면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제는 그게 더 이상 나에게 중요한 기억/정보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그때의 감각과 기억이, 중학생 시절에도 존재하고, 그때의 깨달음이 그 이후의 깨달음보다 못한 것이라면, 의식은 자연스레 그 기억을 지우거나 조정할 것이다. 물론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오래된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지금도 선명히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그게 왜 여전히 기억에 남아있는지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그러한 과정은 어느 정도 명상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의식적으로 반추하지 않으면 그 기억들을 불러올 수 없다.
선명한 기억이 없다. 어쩌면 그때의 나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멍했는지도 모르겠다. 중학생 시절은 감정의 격변을 겪던 때였으므로 여러모로 기억나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대체로 졸고 있었고, 학교가 끝난 후에는 학원에서 억지로 공부 거리를 머리에 집어넣거나,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었다. 내 의지는 크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먹고 자고, 놀고, 행복하면 되는, 별생각이 없고, 또 별생각이 없어도 되는 그런 때였던 것 같다. 물론 그 시절의 우울이나 쓸쓸함 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래서 뭔가를 열렬히 갈망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고등학교 때부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가가 되고 싶은 것과 동시에 공부를 잘해서 뭐라도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늘 졸았고, 쉽게 집중하지 못했으며, 대체로 멍했다. 물론 흥미 있는 것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집중하고 또 집착했었는데 사람은 누구나 다 원래 그런 줄 알았다. 그게 ADHD 였다는 걸 알게 된 건 불과 2년도 안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ADHD보다는 ADD가 맞다. 나는 과잉 행동은 없다. 니가 ADHD가 있다고? 할 정도로 차분하며 조용한 편이다. 하지만 의식이 달나라로 가 있다는 건 나와 가까운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일이다. 수업 시간이나 일상 중에 자주 조는 건 의지가 박약해서라고 생각하기도 쉽다.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카페인을 들이부어도 조금만 지루하면 잠들어버리고, 잠을 잘 자든 못 자든 꾸벅꾸벅하는 건 내가 가진 체력을 생각했을 때 기이한 일이긴 했다. 잠을 못 자더라도 선명히 깨어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던 반면에, 잠을 아무리 잘 자도 잠들던 시간이 있다. 이를테면… 소설론 강의 때는 졸지도 않고 수업 내용을 선명히 모두 기억했던 반면에, 국문학사나 문예사조사 강의 때는 시작 5분 만에 졸아버리는 식이었다. 교수의 강의 문제라기에는 세 수업 모두 같은 교수에게 들었다.
이런 나의 증상에 대해 의심하고, 또 알려준 건 지금 만나고 있는 여자친구였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다, 약까지 먹어가면서 내 의식을 바꾸고 싶지 않다, 는 식으로 부정했고 또 약을 먹기를 피했었다. 그때 나는 사람의 의지에 대해 믿음이 컸던 것 같다.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건 그때에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더 깊이 통감하고 있다.
병원을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직장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였다. 자꾸 시간에 늦을 위기들이 생기고,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평가하고 그 사람에 대해 관찰하고 적어야 하는 과정 중에 조는 일이 생겼다. 오전부터 오후까지,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점수를 매기고, 그에 따른 사항들을 적는 일이었는데 그런 과정이 재미있다거나 인상적일 일은 당연히 없고 꽤나 지루한 일이었다. 어김없이 나는 세 명분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바로 졸아버렸다. 커피를 마시고, 눈가를 주물러도, 애써 무언가를 적어나가도 소용이 없었다. 거의 백지에 가까운 평가표를 보고(거기엔 다양한 형태의 지렁이들이 있었다) 나는 병원을 찾아갔다.
여러 지표 검사를 하고, 뇌파 검사를 마친 후에 결과를 받았을 때 나는 내 뇌의 대부분이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는 걸 알았다. 정확히는 자고 있을 때 나오는 뇌파가 지배적이었다. 늘 깨어있으라는 게, 비유적인 의미가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인 의미로 정말 나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약을 처방받아 먹고 난 후로는 잘 졸지 않는다. 방금 언급했던 그 일 안에서도 나는 졸지 않고 빼곡히 평가표를 적어 내려갈 수 있었다. 그 이후로 엄청나게 똑똑해졌냐 하면 그건 아니다. 도움을 받고 있을 뿐이지 의지는 필요하다. 하려고 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다만 하려고 하면 할 수 있다.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었던 이전과는 다른 점이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가서 약을 받아온다. 그때마다 한 달 동안 잘 지내셨는지, 어떻게 지냈는지 의사는 묻는다. 그래도 병의 소관이 정신과이다 보니, 정신과 의사 특유의 질문인 듯하다. 나는 거기에 성실히 답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가는 게 귀찮아서, 석 달 치 약을 받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 질문과 내 답변이 좋아서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병원을 간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 의사는 하루에 몇 번이나 그 질문을 할까. 한 달 동안, 한 달 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질문을 몇 번이나 할까. 그때마다 어떤 답변을 들을까.
나는 내 지병을 싫어하지는 않는다. 위 문단과 같은 엉뚱한 생각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언어들이 사실은 내 지병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ADHD가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예술가냐, 라고 하면 머리가 복잡해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