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글씨 연습에서 배운 인생 노하우
병원 접수 데스크에 서 있는 나.
“처음 오셨어요?”라는 직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네"
"여기 인적사항 적어주세요"
필요한 정보는 이름, 주소, 전화번호이다.
이름을 쓰고 주소를 쓰려는 찰나.
접수받는 직원의 시선이 내 손 끝을 향하고 있음을 느낀다.
손에 힘이 들어간다. 주소 글자가 삐뚤빼뚤.
'아~ 왜 쳐다보는 거야!'
시선을 느끼며 전화번호까지 겨우 적어 직원에게 전달한다.
어느 순간부터 내 글씨가 맘에 안 든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며 쓴 글씨는 더욱더.
사람들 앞에서 무언가를 하는 게 두렵다.
글씨 쓰는 것조차 이렇게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면 삐뚤빼뚤해지는 걸.
오랫동안 콤플렉스였던 나의 삐뚤빼뚤 글씨가 또 한 번 싫어지는 순간이다.
'글자 연습을 해볼까?'
인터넷 서점에 접속해 '손글씨'를 검색한다.
[국내도서] 미꽃체 손글씨(부제, 손글씨를 인쇄된 폰트처럼),
[국내도서] 손글씨 한글 쓰기(글씨교정필사노트),
[국내도서] 어린이를 위한 미꽃체 손글씨,
...
미꽃체가 뭐지? 호기심에 어린이를 위한 미꽃체 손글씨'를 주문한다.
다음날, 주문한 도서가 도착했다.
책을 펼쳐본다.
음.. 따라 쓰는 거구나.
한 줄, 두줄 그대로 따라 써본다.
그런데 글씨가 너무 크다. 평소에 쓰는 글씨 크기랑 달라서 어색하다.
유튜브를 검색한다.
굴려 쓰기, 빨리 쓰기, 각지게 쓰기,...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글자를 쓰는 유튜버를 발견한다.
오~ 이거 괜찮은데?
한 글자씩 따라 써본다.
여러 가지를 쓰다 보니 내가 원하는 글씨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노트칸을 위, 아래 반으로 나눠서 받침 없는 글자는 위쪽칸에만,
받침은 아래쪽 칸으로.
뭔가 정돈된 글씨처럼 느껴진다.
그래, 이걸로 연습해 봐야겠다.
써보고 싶은 글자를 찾은 내가 대견스럽다.
몇십 년을 글자 쓰기 때문에 힘들어했는데,
이제 나만의 방법을 찾았으니 꾸준히 연습해 보자고 다짐한다.
며칠을 연습했지만, 왜 내 글씨는 유튜브에서 본 것처럼 안 되는 걸까?
핸드폰을 집어 들어 검색한다.
'글씨 잘 쓰는 법'.
검색결과 목록이 나온다.
'글씨 잘 쓰는 법 총정리!'
'글씨 잘 쓰는 법 있을까? 악필교정'
...
찾았다!
글 쓰는 속도를 늦춰보기!
마음이 급하면 글씨도 빨라지고, 더 삐뚤어지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쳐다보면 더 그렇다.
그러나 뭔가 중요한 일은 꼼꼼히, 정성을 들여야 하는 게 정석인 듯하다.
글을 천천히, 정성 들여 써보라고 한다.
기존 습관대로 한 번 써보고, 이번엔 속도를 줄여 또박또박 써본다.
'글씨 잘 쓰는 방법'이라는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쓴다.
'ㄱㅡㄹ(글)ㅆㅣ(씨) ㅈㅏㄹ(잘)ㅆㅡ(쓰)ㄴㅡㄴ(는) ㅂㅏㅇ(방)ㅂㅓㅂ(법)'
음, 조금 나아지는 느낌인데?
다섯 번을 더 써본다.
그래, 마음이 너무 급했던 거다.
잘하려고 서두르다 보니 더 꼬였던 거다.
어른이 되면서 글씨도 빨리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다.
어른이 되었다는 느낌, 어른의 글씨는 뭔가 빨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 기역, 니은을 배우는 나이가 아니니까'라고.
휘리릭 쓰면서도 잘 쓰길 바랐다.
어쩌면 내 일상도 그렇지 않을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빨리 하게 되고, 빨리 하다 보면 오히려 결과가 좋지 않다.
회사에서도 서류나 의견을 작성해야 할 일이 종종 있다.
빨리 써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휘리릭 써서 제출한다.
그리고 나면 어김없이 제출한 이후에 오타나 어색한 문장이 눈에 띈다.
잘하고 싶을수록, 천천히.
글씨 쓰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