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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yfish Jun 18. 2024

비교 좀 그만하며 살자.

스스로 행복할 권리


넘사벽, 엄친아. 유독 우리 사회에는 나와 남을 비교하는 문화가 강한 것 같다.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려고 해도, '내가 남들보다 이걸 잘하나?', '나보다 누가 더 잘하는 것 같던데...'하는 마음에 위축되고 소심해진다.


나도 그랬다. 여태까지 살면서 인생의 대부분은 나에게 집중하기보다는 남들에게 집중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보다는, 남들의 이목에 좋아 보이는 것을 고르고,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는 것보다는, 성공 확률이 높은 "만만한 것"을 골랐다.


핑계 아닌 핑계를 대자면, 그런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었던 건, 주변 어른들의 말 때문이다. (지금은 확연히 많이 줄어들었지만) 



중1 때까지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고, 열등감이 많았던 아이. 그럼에도 부모님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셨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은 나를 '내 이름보단, 전교 1등 동생'으로 부르셨고, 명절 때 만나는 친척 어르신들은 내게 '오빠는 공부 1등 하는데, 넌 뭐하니?'라고 과한 관심을 보이셨으며, 친척 오빠들은 '돼지'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아무리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랐어도, 가랑비같이 조금씩 젖는 이러한 말들은 한 아이의 자신감에 크나큰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중2 때 나의 잠재력을 알아봐 주신 담임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공부를 시작했고, '나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라고 스스로를 믿기 시작했다.



공부라는 것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것보다 더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던 녀석은 바로 '나도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 느낀 자기효능감.

아마 뒤늦게 공부에 맛을 느낀 내가 공부에 중독(?) 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것만이 내가 유일하게 잘할 수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던 것 같다.


디자인스쿨을 졸업하고 유명 패션 디자이너가 된 동기, 세계 유명 제품 디자인상을 수상한 동기. 나도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던 시간들이 무색하리만큼 그들은 너무나도 대단해 보였다.


그때는 디자인과장직을 휴직하고 석사과정을 하고 있던 때였는데, 용기를 내서 나의 요즘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 동기가 한 말이 나의 심장을 찔렀다.


"공부만 계속하시네요?"


훅 들어온 질문에 난 딱히 뭐라 대답할 수가 없어서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그의 말이 정확했을 거다. 세상에 나를 드러내기 두렵고, 나의 능력을 평가받는 것도 너무 두려워 계속 공부만 붙잡고 있었나? 하는 자각이 되었다.


주변의 말들에, 그리고 나 스스로 정한 기준이 못 미더워 나를 믿어주지 않았던 자존감 바닥이었던 나.


화장을 두껍게 하고, 삐딱 구두를 신고, 컬러렌즈를 끼고 다녔던 나.


화장을 지우는 나를 유심히 바라보며, "넌 있는 그대로가 제일 예뻐."라는 남편(당시엔 남자친구)의 말에 울컥했었다. 나도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이유가 충분한 사람이구나를 부모님 외 처음으로 느끼게 해준 남이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내가 어떤 성과를 보여야, 만족할 만한 행동을 해야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7년 전 영어미술교사에 도전할 때도 남편은, "넌 미술도 미국에서 전공했지, 디자인팀장까지 올라갔지, 영어도 잘하지, 아이들도 좋아하지, 못할 이유가 대체 뭐야? 네가 이걸 못하면 누가 해?"라며 용기를 듬뿍 줬었다.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서 나를 서서히 죽이고 있던 내 영혼을 살린 건, 내 남편이지 않을까.


매일매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마치 나의 어렸을 때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한 명 한 명에게 정성을 다해도, 아주 가끔 너무나도 쉽게 나와의 관계를 툭 끊어내는 학부모들에게 과도한 상처를 스스로 자처해서 받는 내게 남편은 내 잘못이 아니라며 감싸준다.


트라우마는 아니겠지만, 내겐 어렸을 때의 기억에 상처가 많다.


미국에서 귀국한 날, 난 부모님께 선언했다. 앞으로 친척들 모임에 가지 않겠다고. 만나면 내게 상처만 주는 사람들을 왜 만나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예전 작은 할머니 장례식에서 미국 남자와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한 친척분은 "코쟁이랑 결혼했네?"라고 하셨으며, 몇 년 만에 만난 고모는 남동생 결혼식에서 날 보고 "아이고. 살쪘네?"라고 하셨다.


물론 지금은 그 말들로 상처를 받진 않는다. 


나라는 방패가 있고, 그 위엔 남편이라는 어마어마하게 강한 코팅이 있으니.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은 없는 법. 아이들에게 보내는 눈빛, 아이들에게 보내는 말투 하나하나 신경 쓰고, 진심을 담는다. 내가 어렸을 때, 상처를 받아봤기 때문에, 그 말투 하나가 평생 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Outlier>에서 본 글귀 중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부분. 몇 십 년 전의 사람들이 지금보다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 비교 대상이 옆집, 앞집이었기 때문. 지금은 비교 대상이 전 세계 사람들이고, 내가 잘 살고 있어도, 나보다 성공한 사람들이 워낙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의 행복이 작아 보인다는 것.


나도 그렇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스스로의 행복부터 챙기는 나의 남편.


그를 보고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배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살기에도 삶은 짧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 내가 잘하는 것들. 이것들에만 집중하기에도 인생이 짧다.


오늘은 어떤 행복한 하루를 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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