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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yfish Jun 27. 2024

취미?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_02

나 혼자만 누리는 사치


미국에서 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다. 사람들은 내 작품에 담긴 생각과 느낌을 궁금해했다. 


99.9%의 사람들이 동일민족인 (내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주변에 다른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없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 특히 내가 학교생활을 했던 샌프란시스코는 여러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난 조소 전공을 했는데, 내가 조소과에서 유일한 한국인, 아니, 유일한 아시아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다름에 주목하기보다는 나의 고유성에 주목해 줬다. 다르다고 차별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해 줬다.


그런 열린 분위기 속에서 나 또한 평생 나를 얽매여왔던 인정욕구를 내려놓고,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행위가 뭔지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처럼.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난 나. 석사 진학과 취업 중에 갈등하던 나는 귀국을 결정했다. 귀국 후 나는 CMF (Color, Material, Finishing) 디자인 일을 했고, 6개월이 1년, 2년, 4년이 되었다.


대리, 과장, 팀장으로 고속승진을 하고 대기업 디자이너들과 임원들에게 인정을 받는 경험은 짜릿했다.


고객들이 지갑을 열 만한 제품을 개발하는 일을 하면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을 다시 까맣게 잃어버렸다. 시시 때때로 수정을 해야 하고 돌발 상황이 생기는 직종 특성상 취미를 가질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주말에도, 밤에도 노트북 와 태블릿은 항상 켜져 있었다. 


4년을 그렇게 사니, 매너리즘을 느꼈고, 우연히 발견한 CMF 디자인 공학 관련 석사 국가 장학금 과정에 지원, 합격 후 석사생이 되었다. 바쁜 일상에서 취미를 가질 시간적 여유 자체가 없었다.




취미가 뭔지, 어떻게 고르고, 어떻게 하는 건지 배운 적이 없으니, 아무리 노오력을 해도, 어려운 부분이었다. 하지만,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남자를 10년 넘게 옆에서 보니, '아, 취미가 이런 건가?'라는 느낌을 어렴풋이 갖기 시작했다.


휴가가 시작되고, 해야 할 일의 부재는 내게 불안감을 주는 것과 달리, 남편에겐 해방감을 주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걸 즐거워하다니 난 이해하기 좀 힘들었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만 같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불안한 감정은 나만 느끼는 것 같았다.


남편은 몇 시간이고, 글을 썼다가, 아무 쓸데없는 (미관상 훌륭하지 못해서 소용가치가 없는) 가죽 지갑을 만들기도 했다. 소설책을 읽고, 어릴 적 즐겨봤던 만화책도 뒤적이다가, 비디오 게임도 했다.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한 나와 달리, 그는 자유로움을 너무나도 즐기고 있었다.


"심심해."라고 말하는 내게, "이거 같이 하자. 재밌는데."라고 천진난만하게 말하는 남편. 난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나는 왜 누군가가 바라보고, 인정해 줘야 그걸 할 동기가 생기는 걸까? 며칠 전 만난 언니에게 물어봤다.


"넌 그런 성향인 거야. 그걸 왜 바꾸려고 해? 취미는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거야. 왜 취미도 꼭 생산적이어야 해? 취미는 말 그대로 취미야. 인정받고 싶고 뭔가 성과가 있는 건 네 일에서 찾아."


눈 딱 감고 그냥 해봤다. 아이패드에 그림도 그리고, 우쿨렐레도 배우기 시작했다.


아이패드에 처음 그려본 그림


매일 연습하기 위해 거실 한편에 세워둔 우쿨렐레


재밌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것에서 오는 해방감. 몰입의 즐거움. 아, 이런 느낌이구나.


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처음 시도하기에 서투를 수밖에 없는 것. 그렇기에 용납이 되는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힘을 빼고 그냥 하는 것. 나 혼자만 누리는 사치.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도, 남편을 맞이할 때도, 난 평소보다 에너지가 넘쳤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처음 느껴보는 감정인 것 같다.


누군가의 인정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할 가치가 있는 행위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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