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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llyfish Jun 26. 2024

취미? 그건 어떻게 하는 거야?_01

열심히 해야만 살아남았던 아빠와 딸


남편은 취미 부자이다.


비디오 게임, 레고, 보드 게임, Creative Writing(오로지 재미를 위해서 하는 글쓰기 - 심지어 내게도 절대 안 보여준다.), 가죽 공예, 일렉트릭 기타 연주 등. 이 외에도 한번 경험하고 재밌겠다 싶은 건 본인의 취미 저장고에 담는다. 도토리를 양 볼에 가득 모으는 햄스터처럼.


그에 반해 나는 취미가 없다. 아니, 얼마 전까지 없었다. 취미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


내가 "누구한테 보여주지 않을 거면 왜 하는 거야?"라고 물으면, 남편은 "내가 재밌잖아. 즐겁고."라며 대답했다. "너도 해볼래? 재밌어." 하는 남편에게 나는 항상 "아니."라는 대답으로 일관했다.


경제적인 소득도, 누군가의 인정도, 커리어의 발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오로지 스스로의 재미와 즐거움을 위해서 하는 행위"는 내가 이해하기 힘든 영역이었다.


유일한 취미는 독서. 주로 자기 계발서를 읽는 내게 남편은, "휴일만이라도 소설을 읽는 게 어때? 그건 일이잖아."라며, 의아한 표정을 보이곤 했다.




뭐든지 잘해야 하고,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 무언가를 지속하는 성향은 아마도 아빠의 영향이 클 것이다.


어릴 때, 무언가를 배우기 시작하거나, 무언가의 성취를 이뤘을 때, 아빠는 "너는 똑똑해서 뭐든지 해도 세계최고가 될 거야."라고 칭찬을 하셨다.


아빠 사업 차 방문한 외국인 바이어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면 아빠는 "영어를 잘하니까 외교관이 될 거야.", 재미 삼아 그린 그림을 보여드리면, "그림 진짜 멋지다! 넌 세계적인 화가가 될 거야."라고 하셨다.


물론 아빠는 나를 아끼고 사랑해서 그런 칭찬을 하신 거란 걸 지금은 잘 안다. 영어미술 홈스쿨을 하고 있는 내게 지금도 아빠는 "제일 유명한 영어미술 브랜드가 될 거야."라고 하신다.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난 아빠는 고등학교 등록금이 없어서 스스로 돈을 벌며 학교를 다니셨다. 그에 반해 큰 아빠는 대학교 등록금은 물론 집안의 유산도 다 물려받으셨다.


큰 아빠댁은 서초백화점 옆 큰 아파트. 명절 때마다 찾아간 그곳. 큰 아빠는 우리 아빠를 항상 무시하셨고, 큰 엄마, 오빠 언니들도 우리를 무시했다. 큰 아빠댁엔 비싼 조각품과 식기류, 카펫 등이 있었다.




내가 1살 때까지 우리는 비닐하우스에서 살았다고 했다. 비가 오면 지붕이 날아가고 쫄딱 젖는 그런 집.


당시 27살이던 아빠는 대기업에 박스를 대는 작은 사업을 시작하셨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죽을 각오를 다지며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셨다고 했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불평등과 멸시. 그걸 평생 받으며 살아오신 아빠는 뭐든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을 사셨다.


이를 갈며 열심히 살아오신 아빠는 홀로그램을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장영실상, 대통령 표창장도 받으셨다. 아빠의 사업 성공은 TV에도 시리즈로 방영이 되기도 하고, 신문기사도 여러 번 실렸다.



아무것도 갖지 못했던 아빠는 오로지 본인만의 노력으로 온 세계를 누비셨다. 열심히 하면 성공하는 삶을 산다는 온몸으로 보여주신 아빠. 그에게 취미는 사치였다.


새벽에 일을 나가 밤늦게 퇴근하는 아빠, 해외 출장도 잦으셨다. 어렸을 때의 추억엔 아빠가 없다. 엄마는 하루종일 우리를 돌보셨고, 아빠는 하루종일 우리 가족의 생계와 미래를 위해 일을 하셨다.


엄마도 아빠도 항상 <해야만 하는 일>을 하셨다. 그런 두 분을 20년 넘게 보며 자라온 나. 순수한 재미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이해를 하려 애를 써도 온몸이 거부하는, 알러지 같은 거다.


평생 먹어본 적이 없는데, 맛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열심히 해야 살아남는 것만 알았던 나. 신은 그런 내가 딱했던 걸까?


나는 어릴 때, 잊을 수 없는 몇 번의 트라우마를 맞았고, 나는 그걸 이겨내기 위해서 예술을 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으니까.


누구를 설득하기 위함이 아닌, 나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행위.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해야 설득력이 있는 작품활동의 세계.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도 되는 수용과 무한한 가능성의 경험은 미국 유학에서 처음 느껴본 감정이었다.


그동안 꽁꽁 숨겨둔 내 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건, 내 주변에 나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이국 땅에선 참 쉬운 일이었다.


허물로 뒤덮인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 날개가 무언지도 몰랐던 내가 훨훨 날고 있었다.


난 단지, 살기 위해서 작품을 했을 뿐인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장학금을 받았다. 누군가를 이기지 않아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뭔지, 세상에 표현하고 싶은 게 뭔지에 집중하는 행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걸 하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깨달았다. 세상에 태어난 지 28년 만에.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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