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류시화]
내가 알아차린 인생의 본질에 대해 말하자면 누구나 가야 하는 인생길은 고통 그 자체다. 지금까지 나를 가르쳤던 수많은 스승들은 왜 인생의 본질이 ‘고통’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 나의 부모님은 왜 인생이 힘든 거라고 나도 내 인생을 힘겹게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고, 너도 힘들어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날들이 있을 거라고 말해 주지 않았을까. 누구도 너의 편은 없고, 세상마저도 너를 걷어차 버릴 때가 있을 테니 홀로 견디고 버티는 게 인생이라고 왜 귀띔해 주지 않았을까.
영화 『달콤한 인생』에서 황정민이 이병헌에게 “몰랐어? 인생은 고통이야.”라고 날리는 대사를 새겨 들어야 했던 걸까?
서른이 되어서야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인생은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부터가 고통과 번뇌의 시작이다. 나는 한국 교육의 커리큘럼 속에서 ‘답을 찾는 것’에 세뇌되어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정확한 이유를 찾고, 명확한 결론을 찾으려 애썼다. 어디엔가 ‘인생의 진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며 찾고 또 찾았다. 아마 이것이 내가 처음 스스로 책을 집어든 이유일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독서실 한편에 있던 인터넷 강의실에 앉아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강연을 틀어 놓았던 기억이 난다. 옆 친구들은 다 사회탐구 영역 인강을 듣고 있었는데 그때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혼자 그 책을 펴 놓고 똘똘한 눈으로 마이클 샌델의 하버드 강의를 들으며 머리를 식혔다. 지나가던 우리 반 1등이 신기하게 쳐다보며 재밌냐고 물어봤다. 그다음 책은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였던 것 같다. 19살의 나는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나 보다.
인생의 교과서같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정해져 있는 책이 있는 줄 알았지만, 정해져 있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뿐이었다. 이것이 진리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말도, 글도, 삶도 좇아 봤지만 인간은 누구나 한때는 옳고 한때는 틀린 존재이니 다른 사람의 말에 기대어 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세상에는 이유가 없는 일과 결론을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고, 그 속에서 고민과 고통과 번뇌가 연속된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아하는 것을 찾고, 가치 있는 것을 찾고, 보람된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이 모든 것들은 고통을 잊고 삶을 버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일지도 모른다. 고통을 아름답게 포장해 나가는 것, 그것을 인생이라 이름 지었나 보다.
류시화 작가는 삶이 힘들수록 마음속에 ‘아름다운 어떤 것’을 품고 다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어느 날 류시화 작가가 새로 출간한 책 제목을 보자마자, 주문하고, 책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류시화 작가님의 팬이 되었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이 말은 나의 내면의 소리를 누군가 밖으로 끄집어낸 것 같았다. 작년 한 해 동안은 내 인생을 통틀어 몸도 마음도 너무나 괴롭고 아팠던 상실의 시간이었다. 내가 믿어왔던 한 조직(어떤 의미로든)을 떠나왔고, 그로 인해 그 안에서 좋아했던 사람들을 잃었다. 내가 가장 존경했던 사람이 내 가슴에 칼을 꽂았고, 영혼의 단짝으로 생각했던 친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나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며 하루는 직장에서 집에 오기까지 하루종일 울음을 간신히 꾹 참은 적도 있었고, 하루는 차 안에서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하루는 심리상담사 앞에서 먼저 떠나보낸 친구를 떠올리며 오열하기도 했고, 하루는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오게 된 이유를 찾아보자며 내 자신을 자책하기도 했다. 이 모든 복합적인 감정을 무어라 표현할 말도 없고 설명하기도 어려웠는데, 내 마음을 나타낼 적당한 말을 찾은 것 같아서 안도가 됐다.
이 인생은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다. 내가 생각한 세상이 아니며, 내가 생각한 세계가 아니다(세상과 세계를 다른 의미로 썼다. 결론적으론 둘 다 내 생각대로는 아니다). 인생의 길도 내가 생각한 길이 아니고, 진리도 내가 생각한 진리가 아니며, 시간도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다행이냐니. 모든 일들이 나의 제한된 상상을 벗어나 훨씬 큰 그림 속에 펼쳐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작가의 말에 난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나가면서 어처구니없게 웃던 내 표정은 점점 진지하게 뒤바뀌었다. 순간의 생각을 전환시키려는 가벼운 말이 아니라서, 작가가 겪고 깨달은 인생이 생각보다 깊고 심오해서.
작가가 책의 말미에 적어놓은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의 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볼 수 있다면 그 길은 자신의 길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자신의 길로 여긴 타인의 길일 것이다. 자신의 길은 한 걸음씩 내디디면서 알아가야 한다. 영혼은 그 여행 자체를 좋아한다.” 그동안 내 미래를, 내 진로를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그려놓고, 그에 맞춰서 살아왔던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게 한 말이다. 길을 찾으려 애쓰지 말고 인생을 가볍게 여행하는 방법을 배워보려 한다.
그 길을 볼 수 있다면, 내 길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