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회사 동료 둘과 저녁을 먹었다. 이 둘은 나의 가장 친한 회사 동료들로 나의 성적 지향부터 가치관, 깊은 고민이나 생각까지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다. 곱창은 맛있게 익어가고 있었고 각자 한 점씩 입에 넣으며 부드러운 곱에 감탄할 때쯤이었다. 회사 동료 E가 회사 동료 S에게 S의 학창 시절 모습에 대해 물었다. “너는 학창 시절 때도 지금이랑 비슷했을 것 같아, 중, 고등학교 때는 어땠어?” S는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진짜 찐따였어.” 예상치 못한 답변에 E와 나는 웃음이 터졌다. 어디 웅변대회라도 나간 사람처럼 본인이 얼마나 찐따였는지를 하나 둘 근거를 들어가며 얘기하는 S를 보며 못 말린다고 생각했다. 그 후 자연스럽게 E는 나의 학창 시절이 궁금해졌나 보다. “너는 인기도 많고 좀 놀았을 것 같아. 어땠어?” 나의 학창 시절이라….. 한동안 기억 저편에 보관해 두었던 이야기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소중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고통스러웠던 학창 시절, 지금의 나를 위해 치열하고 고통스럽게 버텨준 15년 전의 나, 그때의 그 소년이 설렘과 긴장을 품은 채 문 뒤에서 자신의 이야기로 통하는 문을 열어줄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소년을 토닥이며 문 안으로 들어갔다.
15살의 나는 최악이었다. 가족한테는 골칫덩어리였고, 학교에서는 문제아였으며, 사회적으로는 비행청소년이었고, 나 자신에게는 감당 불가한 폭군이었다. 15살의 나는 혼란 그 자체였다. 매일이 교회에 간 스님처럼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초대된 불청객 같은 느낌이었다. 하루하루가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있으면 안 될 곳에 내가 존재해서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는 느낌, 자유롭지 못한 느낌 그리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게 태어난 느낌.
나의 부모님은 미디어에 전형적으로 묘사되는 ‘보수적인 한국 부모님’이었다. 물론 그 정도가 좀 더 지나쳤던 것 같긴 하지만. 자식 공부가 제1의 관심사이며 자식의 성적에 병적으로 집착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뭘 좋아하는지 보다는 어떤 대학의 어떤 과에 가야 하는지가 더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나의 꿈을 말하기라도 하면 언제나 비웃으며 절대로 그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확신에 가득 찬 표정으로 나를 무시했고 무조건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몇 학년 몇 반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반에서 몇 등인지는 알고 있었고, 내가 언제 행복한지는 모르면서 나의 행복을 위한 길은 안다고 굳게 믿으며 나의 미래를 설계했다. 가장 소속감을 느끼며 안정감을 느껴야 할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의 사회에서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내 방은 내가 공부하고 자는 곳이라는 사실 외에는 나의 공간이 아니었다. 우리 어머니는 내 서랍과 쓰레기통까지 뒤져보면서 나의 모든 일상을 알고 싶어 했고 통제하고 싶어 했다. 엄마가 원하면 언제나 휴대폰의 모든 메시지와 통화기록을 보여줘야 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가야 했고 학원이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의 통제에 벗어난 일을 하면 나는 속 썩이는 못된 아들이었고, 불량한 학생이었으며, 가족을 힘들게 하는 나쁜 사람이었다. 나는 그저 숨을 쉴 수 있는 작은 여유를 만들고자 한 것뿐인데 나는 가족들을 괴롭히는 나쁜 아이였고 그 사실이 나를 매일 괴롭혔다. 이 무렵 나는 나의 성적 지향성도 알게 되었다. 남자라면 응당 여자가 좋아야 하지만 남자에게 끌리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미치도록 싫었다. 여자 같은 내가 싫었고 남자를 좋아하는 내가 역겨웠다. 남자애들끼리 모이면 ‘게이’ 드립은 빠지지 않는 소재였고, 온갖 혐오스러운 수식어를 가져다 붙이며 게이를 비난하면 나는 나의 당사자성을 철저히 외면하고 같이 깔깔대며 게이에 대한 모욕을 더했다. ‘게이’ 드립이 심해질수록 진짜 ‘나’는 수많은 상처로 피를 흘리며 침전하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혐오하며 왜 나는 이렇게 태어났을까 수많은 날을 눈물로 지새우며 나를 이곳에 던져 놓은 조물주를 원망했다.
살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걱정과 불안, 혼란스러운 자아, 세상에 대한 적개심으로 매일 새벽 세시가 넘어서야 눈을 감을 수 있었고 잠들기 전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기를 간절히 빌며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 새로운 하루를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지겨웠다. 삶이라는 게 이렇게 괴로워야 한다면 세상이 잘못 설계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뚤어지기로 결심했다. 난 어차피 일찍 죽고 싶었다.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 술은 이 잘못된 세상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여행이었고 담배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다독이는 진정제였다. 학교에서 세상을 나와 비슷하게 바라보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불만이 많고 무서울 게 없는 친구들. 학교에서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선생님들은 나를 기피했고 동급생들은 나를 무서워했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죽어있던 내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나의 존재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도 나의 존재감이 확실해졌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잘 놀면서 쿨하고, 성적도 좋은 특별한 존재였다. 점점 가족들과 마찰이 잦아졌고 감정의 골이 깊어졌으며 집을 수시로 나갔다. 나를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더 이상 인정받고자 노력할 동기도 힘도 없었다.
나를 평가의 잣대에 올려놓는 모든 사람이 싫었다. 그래서 나의 놀이터는 건물 옥상이었다. 건물 옥상은 하늘과 가깝고, 조용하고, 아무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파아란 하늘을 이불 삼아 누워있을 수 있었고, 그 누구도 나에 대해 떠들 수 없었으며, 아무에게도 평가당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떨어져 죽을 수 있었다. 건물 옥상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담배를 필 수 있었다. 이소라의 ‘Track9’을 들으며 피는 담배는 눈물 맛이었다. 원치도 않는 인생을 나에게 함부로 선물해 준 모든 존재들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이소라의 노랫말을 읊조려야 했다. 그렇게 세상을 증오하고 나를 혐오하며 시간은 아주 더디게 흘러갔다.
나는 불행했다. 너무나도 불행했다. 내가 그리는 미래는 가족도 세상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살 수 없었고,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었으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미래를 꿈꿀 수도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즐길 수 없는 현재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는 미래, 그리고 동성애자로 태어난 나의 과거까지 나의 모든 시간을 부정하고 싶었다. 이 흐르는 시간을 끊으려면, 예견된 불행한 미래를 마주하지 않으려면 나는 죽어야 했다. 나의 놀이터의 끝자락에 서서 죽음을 결심했다. 한 발짝만 내딛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행복할 필요는 없었다. 불행, 우울, 증오와 같은 것들이 없는 ‘무’의 상태로만 갈 수 있다면 내 목숨 정도는 쉽게 내줄 수 있었다. 근데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난 모든 준비를 끝냈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눈물이 난다. 억울하다. 분하다. 내가 도대체 무얼 잘못했길래 나의 이야기는 불행한 결말로 끝나야 하는 걸까. 건물 옥상 끝에서 내려와 소리 내어 울었다. 아주 처절하고 구슬프게 울었다. 울다가 정신이 없어질 때쯤 눈물이 멎었다. 그렇게 나는 우연하게 얻은 불행한 첫 번째 인생을 버리고 내가 나에게 직접 선물한 두 번째 인생을 얻었다.
“당연히 좀 놀았지~ 나는 노는 앤데 성적도 좋아서 인기 많았다? ㅎㅎ”
아직 웃으면서 터놓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닌가 보다. 이 이상으로 얘기하고 싶지는 않은 거 보면 말이다.
15살의 나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건넸다. 15살 나의 세상을 나와 문 앞에서 15살의 나를 꼭 껴안아주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고생 많았다 소년. 정말 고맙다 그날의 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