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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히콥스토스 Jun 19. 2024

이쪽 세계

세계관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다소 생소할 수도 있지만 영화나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들어봤을 단어다. 작가들이 스토리를 만들어낼 때 그 스토리가 쓰이는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그려낼 때 우리는 그 세계를 하나의 세계관이라고 부른다.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요즘은 아이돌들도 각 그룹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음악활동을 진행해 나가는 게 한 트렌드가 되어 요즘 세대들에게는 이 단어가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쪽 세계는 어떤 스토리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세계관일까?


사실 이쪽 세계는 작가들이 스토리를 위해서 만든 것도 아이돌들의 음악활동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그저, 대한민국 게이 남성들이 사는 세계, 즉 게이 남성들의 생태계와 문화를 일컫는 말이다. 흔히 “이쪽 세계에서는~”이라고 운을 띄우며 한국 게이 남성들의 문화가 어떤지 설명할 때 쓰이곤 한다. ‘자기를 포함한 여러 사람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라고 국어사전에 풀이되고 있는 ‘이쪽’이란 단어는 게이 남성들이 헤테로섹슈얼의 세계와는 다른 그들만의 세계를 칭하기에 매력적인 단어였나 보다. 이 세계에서 ‘이쪽’은 꽤나 다양하게 사용되는 수식어이기도 하다. 이쪽 친구, 이쪽 사람, 이쪽 클럽, 더 나아가 대한민국 게이 남성들이 주로 가는 술집만을 아카이빙 해놓은 ‘이쪽 술집’이라는 사이트가 있는 것만 봐도 이쪽 세계에서의 ‘이쪽’ 활용법은 차고 넘친다.


대한민국 게이 남성인 나는 아쉽게도 ‘이쪽’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항상 ‘이쪽’이라는 수식어를 들을 때마다 ‘이쪽이 있으면 저쪽도 있나? 그럼 저쪽은 뭔데?’ 하며 반감이 든다. 왠지 모르게 ‘이쪽’이란 단어 자체가 헤테로섹슈얼과 호모섹슈얼을 구분 지으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어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이지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나를 구분 짓는 요소가 되어 차별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쪽’이라는 단어로 우리를 구분하며 오히려 ‘저쪽’과 거리를 두는 것만 같다.


이런 굳건한 개똥철학에도 불구하고 나도 어찌할 수 없는 ‘이쪽’ 사람이란 걸 깨달은 날이 있다. 얼마 전 런닝을 끝내고 집에 돌아올 때 무릎 바깥쪽이 찌릿찌릿 아파, 정형외과에 간 적이 있다. 진료가 끝나고 처방과 치료를 받고 나오는 길에 근처 약국을 들렀다. 약국은 2평 정도 되는 아주 작은 크기였고 작은 크기를 최대한 활용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양쪽 벽면과 약국 데스크 앞으로 건강보조제와 약들이 빌딩처럼 솟아있었다. 나는 처방전을 약사에게 전달하며 짧게 인사를 했다. 그때 처음 보게 된 약사는 누가 봐도 훈남이었다. 큰 키에 건장하고 탄탄한 체형, 매력적인 얼굴에 지적여보이는 안경까지, ‘네 알겠습니다.’하고 나지막이 뱉을 때 느껴졌던 중저음의 목소리는 화룡점정이었다. ‘이 아저씨 여자 손님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약국 중 굳이 이 약국을 찾아오는 여자 손님들을 상상하며 ‘이 약국, 크기에 비해 돈 많이 벌겠는데.’ 혼자 미인계 마케팅의 좋은 사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전부 다 내가 상상한 이야기일 뿐이다. 금방 약을 조제하고 나온 약사는 나에게 약을 건네며 가격을 말해주었다. 카드 결제가 끝나고 카드를 건네받으며 약사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는 그 찰나, 그의 눈과 내 눈은 마주쳤고 그 눈빛을 통해 내 뇌에서는 필터 하나 거치지 않고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이 남자 이쪽 스멜이 나는데.’ 게이들은 게이들을 알아본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원하고 바라지 않아도 느껴지는 이 게이들만의 육감.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내 머릿속에 그 약사는 게이가 되어 있었고 많은 약국 중 굳이 이 약국을 찾아오는 여자 손님들이 불쌍하다는 상상까지 하며 혼자 킥킥댔다. 하지만 동시에 ‘나도 이쪽과 저쪽 중에는 이쪽일 수밖에 없구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조금 씁쓸하기도 했다.


그 후 나의 무릎통증은 점차 나아졌다. 2주쯤 후, 회사 사람들과 서울 프라이드 퍼레이드에 참여했고 2시간 행진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무릎이 좋아졌다. 나아진 무릎에 의사와 약사에게 감사해하며 퍼레이드에 놀러 와 신난 군중들을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무언갈 발견하고 혼자 킥킥대고 웃기 시작했다. 내가 왜 갑자기 웃는지 회사 동료들이 의아해했다. 아무한테도 왜 웃는지 얘기할 수가 없었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익숙한 얼굴의 약사가 남자친구와 퍼레이드에 놀러 와 있었다.

‘거봐, 내가 이쪽 스멜 난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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