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봄은 유난히 길고 예뻤다. 미세먼지가 적어 맑고 푸른 하늘과 인사할 수 있는 날들이 많았고 봄도 평소보다 길어 4, 5월 두 달 동안이나 싱그럽고 화사한 봄의 미소를 즐길 수 있었다. 이 기회를 빌어 나는 강으로, 산으로, 공원으로 바삐 놀러 다니며 이번 봄을 만끽했다. 이런 다양한 봄의 추억들 중에서도 이번 봄이 나에게 처음으로 선물해 준 추억이 있는데 그건 바로 벚꽃놀이다. 나는 여태 한 번도 벚꽃구경을 위해 어딘가를 가본 적이 없다. 표면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굳이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서 불편한 답답함을 느끼고 싶지 않았고, 집 앞에 심어진 세 그루의 벚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환해지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에게 벚꽃은 그저 매해 봄, 피었다 지는 여러 꽃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이런 표면적인 이유들을 제쳐두고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면 연인들이 찾는 벚꽃명소에 게이커플의 모습으로 사람들 눈에 띄어 불편한 시선을 받고 싶지 않음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나만의 생각일 수도 있지만, 벚꽃놀이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커플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남자 둘이 벚꽃놀이를 가는 모습을 상상했을 때,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것 같다. 나와 내 연인을 가리키며 ‘게이커플’이라고 수군거리지는 않을까, 더 나아가 게이커플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우리를 흉보고 있지는 않을까 신경을 곤두 세워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우리는 커플이 아니라 친구임을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도 느낀다. 커플이 아닌 친구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우리의 행동을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우리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건 더 어려워진다. 이런 나에게 벚꽃놀이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남자친구가 먼저 벚꽃놀이를 제안한 것이다.
내 남자친구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이다. 우리는 각자의 국가에서 살아가며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소위 말하는 롱디커플(Long-distance couple)이다. 롱디커플의 당사자로서 겪는 행복과 아쉬움도 정말 많지만, 이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고, 우리가 롱디 커플임을 밝힌 이유는 내 남자친구의 벚꽃놀이 제안이 왜 유별난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내 남자친구는 벚꽃이 없는 국가에서 태어나 살고 있어 우리가 너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만개한 벚꽃들이 그에게는 다른 국가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이국적인 풍경이다. 자연의 고요함과 위대함 그리고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나의 남자친구에게 활짝 핀 벚꽃들의 웃음은 너무 따뜻하고 기분 좋은 설렘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그에게 1-2주밖에 되지 않는 짧은 벚꽃개화 기간은 1년 중 그가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시기로 자리 잡았다. 그 기간에 일본과 한국으로 벚꽃 여행을 가는 건 그에게는 기념일과 같은 것이었다.
3월 어느 하루, 남자친구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한국의 벚꽃 개화시기가 언제인지 물어보는 메시지였다. ‘I have no idea.’ 벚꽃에 큰 관심도 없고 남자친구의 벚꽃 사랑을 모르던 나는 별생각 없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몇 분 후 남자친구는 한국 여행 소식을 알려주는 인스타그램 계정들을 뒤져 한국의 벚꽃 개화시기를 알려주는 게시물을 나에게 공유했고, 그 시기에 벚꽃을 보러 한국에 오겠다고 비행기 티켓까지 예매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벚꽃에 이렇게 진심인 남자라니… 아니 그보다 벚꽃이 그에게 무엇이길래 이걸 보러 한국까지 온다는 걸까 싶었다. 나에게는 그저 잠깐 피고 지는 꽃일 뿐인데.
벚꽃을 보러 한국에 온다는 남자친구 덕분에(?) 나는 평소의 나답지 않게 벚꽃 명소들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초록색 검색창에 ‘서울 벚꽃 명소’를 타이핑하며 여러 정보를 찾아보았다. 이럴 수가.. 언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벚꽃에 진심이었던 걸까. 나만 모르고 있었나 보다. 서울의 벚꽃 명소를 추천하는 글들은 수백 개에 달했고 심지어 벚꽃놀이를 다녀온 블로그 글도 수천 개는 되는 것 같았다. 벚꽃 앞에서 찍은 예쁜 사진들은 덤이었다. 나는 천천히 벚꽃 명소들을 살펴봤다. 여의도, 석촌호수, 어린이대공원 다 너무 좋았지만 사람이 너무 많을 것 같았다. 많은 인파로 인한 피로감도 문제지만 남성 둘이서 벚꽃을 구경하러 와서 달달한 분위기를 내는 우리를 쳐다볼 수많은 시선이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러던 중 예전에 동부간선도로를 운전하다가 너무 예쁜 벚꽃길을 발견하고 감탄해 네이버 지도에 해당 장소를 저장해 두었다는 사실이 생각이 났다. 자동차 도로 옆이라 사람들도 많이 없을 거고 길게 이어진 벚꽃 길에 남자친구도 만족할 것 같았다. 좋아, 준비 됐어. 오기만 해!!
그렇게 떠난 벚꽃놀이는 내 우려와는 달리 너무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었다. 흐드러지게 피어 끝을 찾을 수 없는 벚꽃 터널이 우리를 하얗게 반기고 있었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나부끼는 꽃잎들은 마치 연못 위에 윤슬처럼 일렁이듯이 떨어지고 있었다. 만개한 벚꽃무리를 보는 것이 이렇게나 화사한 충만함을 안겨주는지 꿈에도 몰랐다. 하얗게 속삭이는 벚꽃들 사이에서 나는 이루마의 피아노 선율을 눈으로 듣는 것만 같았다. 벚꽃 노관심남이던 나도 이런 감흥을 느끼는데 과연 나의 남자친구는 어떤 기분일까 싶었다. 옆에 서있는 그의 표정을 보니 그가 얼마만큼 행복한지 알아챌 수 있었다. 아름다운 벚꽃나무들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하얀 파도에 넋을 놓고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따금 눈을 감고 꽃잎들이 서로의 뺨을 부비는 소리를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커플이 서로의 벚꽃사진을 찍어주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 둘은 뒤이어 벚꽃을 배경으로 그들의 모습을 담고자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저렇게 찍으면 제대로 된 사진이 나올 리가 없잖아.’ 사진 찍기에 일가견이 있는 나는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어, 곧바로 커플에게 다가갔다. “두 분 같이 사진 찍어드릴까요?” 안 그래도 같이 사진이 찍고 싶었던 참이었는지 너무 해맑은 얼굴로 여성분이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전신샷, 상반신 샷, 세배줌, 가로샷, 내가 가진 모든 무기를 꺼내 이 커플을 만족시켜 주고자 애를 썼다. 다행히 인생샷이 세장 정도는 나온 것 같아 기뻐하고 있던 찰나, 두 남녀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너무 감사합니다. 혹시 두 분도 찍어드릴까요?”
사진 찍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는 옆을 쳐다봤고 남자친구는 멀뚱히 옆에 서있었다. 우리 둘을 찍어주겠다고? 우린 남자 둘인데? 남자 둘이 벚꽃을 보러 온 게 이상하진 않은가? 표정을 숨겨야 된다는 생각도 못하고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희 둘이요?” 돌아오는 대답은 천진난만했다. “네!” 그렇게 나는 남자친구와 벚꽃사진을 찍게 되었다. 수많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 커플인 걸 들켰나? 근데 왜 저 둘 표정이 해맑지? 아니면 그저 친구 사이인 남자 둘이서도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게 흔한 일인가? 우리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하면 어떡하지?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나갈 때였다. 우리는 어색하게 카메라 앞에 섰고 이런 경험이 흔치 않아 쭈뼛거렸다. “계속 찍을게요!” 하필이면 그 커플도 인생샷에 책임감을 느끼는 커플이었던 모양이다. 다양한 각도로 우리의 사진을 찍어주며 최대한 예쁜 사진을 남겨주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우리는 열심히 찍어주는 그들에게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표정도 바꾸고 포즈도 조금씩 바꿔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짧지만 길었던 사진 찍기가 지나갔다. 나는 커플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으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벚꽃 앞에 우리는 너무나도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약간의 어색한 미소와 긴장된 포즈는 꾸며지지 않은 우리의 모습 같아 더 아름다워 보였다. 화창한 봄, 만개한 벚꽃,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우리 둘. 우리도 한국에서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구나. 우리도 어떤 한국인들에게는 평범한 커플로 여겨질 수 있구나.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따뜻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구나. 나무가 떨어뜨리는 벚꽃잎의 작고 하얀 예쁜 생각과 마음들이 내 머리에 그리고 내 가슴에 살포시 앉았다.
그렇게 나는 처음으로 벚꽃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커플은 처음으로 인생샷을 얻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