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한자에는 이야기가 있다
‘너그러움’을 관寬 이라 한다. 글자의 구성은 집 면宀 과 산양 관萈 으로 이루어졌다.
산양의 집을 말하는 것일까? 동물들의 보금자리는 집 면宀 보다는 구멍 혈穴이 적합하다. 실제로 산양은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절벽 사이의 좁은 바위 틈에 보금자리를 만든다. 그러니 비유이다.
산양을 보려면 대개 햇빛이 잘 드는 남쪽, 사람이나 다른 동물이 접근하기 어려운, 높은 바위산 절벽 끝으로 가야한다. 그래서 성경의 시편(104: 18)에서는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며 바위 틈은 너구리의 피난처로다."라고 노래하였다. 산양 혹은 야생염소를 히브리어로 '야엘'이라고 한다. '높이 오르다'가 원래 뜻인데, '~보다 탁월하다, 능가하다'를 뜻하는 야알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이를 따르면, 너그러울 관寬은 산양의 서식처와 같이 광활하고 높은 장소에 세운 고귀한 집을 말한다. 고대에 이런 집이라면 신전이나 왕궁 뿐이었다. 올림프스 신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러한 신전을 히브리어로 '바마'라고 한다. 원래 의미는 '높다高'를 뜻하는 말인데, 이를 한글성경에서는 산당(높은 산위에 있는 예배장소)이라고 번역했다. 그렇다면 산당과 너그러움은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앞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편에서 설명한 근심할 우憂를 소환해보자. 설명한 바와 같이 우憂는 산양의 탈을 쓰고 고심하는 제사장의 모습을 그린 한자이다. 산양은 고상함을 상징한다. 산양은 되새김질 하는 초식성 동물로 주로 새벽과 저녁에 활동하며, 천적에게 쫓길 때를 제외하면 자기영역을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수컷은 짝짓기를 제외하면, 무리에 들어오지 않고 혼자 살거나 수컷끼리 모여 지낸다. 산양의 이러한 특징은 세상과 분리되어 높은 신전에 머무는 제사장을 상징하기에 알맞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너그러울 관寬에서 산양 관萈은 실제 산양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산양의 탈을 쓰고 있는 제사장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는 넉넉할 우優가 뒷받침하고 있다. 근심할 우憂는 산양의 탈을 쓰고 기우제를 지내는 제사장을 말하며, 보통의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는 의미에서 '낫다, 능가하다, 넉넉하다'등의 뜻이 나왔다. 여기에 사람 인人을 더해 산양의 탈을 쓰고 춤을 추는 제사장처럼 고대에 탈을 쓰고 연기를 했던 우인優人을 뜻했다. 이로부터 오늘날 연극이나 영화 따위에 등장하는 배우徘優라는 말이 나왔다.
이렇듯 너그러울 관寬은 높은 곳에 세운 산당宀을 가리키며, 아울러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萈의 모습이다. 그 제사의 보답으로서 신이 인간에게 베푸는 '용서와 관대함'을 뜻한다.
문자의 의미를 알고보니,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말 결코 가볍게 받아들여서는 안될 말이다. 용서와 관대함은,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 마음이다. 숨을 헐떡이며犧 죽어가는 어린 양의 숭고한 희생의 값을 치르고서야 비로소 인간에게 베푸는 마음이지 않은가. 희생제사를 받는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목숨은 목숨으로 값아야 한다. 그것이 정의다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