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브런치 접속이 영 뜸했다. 사실, 브런치를 들여다볼 짬도 낼 새 없이 바빴다는 표현이 맞다. 브런치에서 보낸 알림이 퇴근 후 너덜너덜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기어이 컴퓨터 앞으로 이끌었다. 오늘 브런치가 내게 보낸 '글쓰기는 운동과 같아서 매일 한 문장이라도 쓰는 근육을 기르는 게 중요'하단 말과 '오늘 떠오른 문장을 기록하고 한 편의 글로 완성'해 보란 권유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마치 누군가 요 며칠 여러 모로 심란한 내 모습을 보고 알림을 보낸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운동, 맞다. 진짜 근육은 없어도 글쓰기 근육마저 잃을 순 없지.
학교의 학기 말이 바쁜 이유는 한 해를 마무리하기 때문이기도, 동시에 다가올 다음 해를 대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다가올 학년도에도 주요 업무를 나눠 맡을 '보직교사(소위 부장교사)'를 어느 정도 정해둔 후, 준비가 필요한 업무는 미리부터 처리하곤 한다. 안 그래도 '교직만족도'가 떨어지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보직교사'를 원하는 사람이 많을까? 대단한 보상은 차치하고, 다들 하기 싫어하는 업무를 떠맡아 고생하는 일이 허다하기에 '보직교사' 기피 현상이 심해지는 것 역시 당연하다.
이런 글을 쓰고 있지만, 막상 나도 10년이란 교직 경력의 거의 절반을보직교사를맡아왔다. 사실 웃기는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 이런 날 보면 '젊은 사람이 승진 욕심이 대단하다'거나, '뭔가 큰 야망이 있는가 보군'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직교사를 맡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이다. 부끄러운 선배는 되기 싫다,는 알량한 자존심. 상황이 나를 이끌었고, 쥐뿔만 한 자존심과 대책 없는 성격이 실행력을 발휘했다. 거기에 욕심이 더해진다면 '더욱 전문성 있는 교사가 되고 싶다'는 욕심 정도다. 선배님들껜 죄송하지만, 승진하신 선배님들이 걸으시는 길이 꽃길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존경스럽고 감사함에도 내가 그 길을 걷고 싶은 마음은 아직까지는 없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교감선생님이 날 찾아와서는 조심스레 혹시 내년에 교무부장을 맡아볼 생각은 없냐고 물으셨다. 학급 수가 줄어들면서 우리 학교에 새로 들어올 교사가 없다는 사실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교감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통상적으로, 정말 통상적으로 '교무부장'은 관리자 승진을 염두에 둔 고경력 선배님들이 주로 맡는 보직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일 할 사람이 없기로서니, 설마 교무부장의 자리가 이제 겨우 경력 10년인 내게까지 올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난처한 기색과 미안한 기색을 비추며 본인의 여러 경험을, 이런저런 자초지종을털어놓는 교감선생님의 입장이 이해도 되었기에 더 당황스러웠다. 본인께서도 첫 부장을 물부장(경력에 산정되지 않는 보직교사)으로 시작했고, 첫 보직을 '교무부장'으로 시작했다는 이야기. 하늘 같은 선배님들 앞에서 교무부장 역할을 하기 위해 앞에 나설 때마다 떨려서 어쩔 줄 몰랐다는 이야기. 내년에 우리 학교에 남아 있을 선배 여럿을 찾아가 어렵게 말을 꺼내보았지만 모두 단호하게 거절했단 이야기를 들으며 혼란은 커져만 갔다.
선량한 성품의 교감선생님께서는 오늘 당장 답변하지 않아도 된다며, 다만 고민을 좀 해줬으면 좋겠단 이야기를 내게 남기고 나가셨다. 마침 교육청 출장이 있어 나 역시 바삐 학교를 나왔지만, 집에 와서도 복잡한 머리를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맥주 몇 캔을 비우며 고민했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이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내가 느끼는 감정을 무어라 칭해야 할지 알 수도 없었다.
어떤 토론
그러다가 어느 해였나, 교내 자발적 교사 공부 모임에서 나눴던 토론의 주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L 선배('친애하는 선배님들께')를 필두로 정해진 책을 읽고, 논제를 정해 토론을 나누는 식으로 공부를 했다. 그날의 주제는 '교사가 꼭 도덕적이어야 할까?'였다. 내가 그날의 주제를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그 주제를 두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어느 선배의 모습이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까닭이다.
그날 Y 선배는 '교사라고 해서 꼭 도덕적일 필요는 없다.'며 본인의 주장을 펼쳤다. '교사도 사람'이기에 늘 도덕적일 수는 없으며, 교사라는 이유로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건 사회적 편견이라고 했다. 나의 의견과 정확히 반대되는 Y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쩔 수 없이 Y 선배의 평소 행실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 글에 차마 다 밝힐 순 없지만, 저런 선배는 되고 싶지 않다고 느꼈던 여러 일을 떠올리며 더욱 Y 선배의 의견에 반하는 의견을 고수하게 되었다.
적어도 아이들 앞에 서는 교사라면, 도덕적인 '척'이라도 해야 한다는 게 나의 의견이었다. 아이들이 교사의 작은 말과 행동에도 영향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임을 판단하는 잣대는 너무도 많고, 늘 그러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도덕적인 사람의 표본이 되려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는 게 근거였다. 그리고 그날의 일을 떠올리며 불현듯, 무어라 설명할 수 없이 나의 기분이 나빴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바로 '실망감'과 '절망감'이었다.
부끄러운 선배는 되고 싶지 않은 후배의 입장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강수연 씨가 생전 즐겨했다던 말, 어느 유명한 영화의 대사가 되어 더욱 유명해진 말을 나도 평소에 잘 써먹곤 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물론 주로 후배 교사들 앞에서이다. 나 역시 잘 모르고 두렵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고 싶을 때, 혹은 후배들이 별 터무니없는 일로 걱정할 때, 또는 박봉에 사회적 인식도 별로 좋지 않은 우리 직업을 자조적으로 한탄할 때….
선배님들에게도 각자의 입장과 사정은 있을 것이다. 까짓 거, 정 방법이 없다면 '교무부장', 그래 내가 할 수도 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학교 공동체를 위해서다. 하지만 솔선하고, 양보하고, 희생하는 선배님들이 내게까지 미친 영향력이, 우리의 이 자랑스러운 선순환 문화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이런 의구심을 느끼게 되는 것 자체가 실망스럽고, 절망스럽다.
나이가 많으면 월급을 더 받는 '호봉제' 시스템 속에서, 꽁으로 월급 더 받는 값을 해야 한다며 솔선하셨던 선배님들의 모습이 멋지고 존경스러웠기에 나 역시 그런 선배가 되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런 선배를 두지 못한 선배님들을 내가 오히려 안타깝게 여겨야 하는 걸까? 아니면'호봉제' 시스템은 원래 그렇게 생긴 거였는데, 그저 내가 잘 적응하지 못한 부진아인 걸까?
교사도 공무원이기에 가끔 할당량으로 동원되어야 하는 투표사무원 혹은 임용감독관 등의 자리에 '젊은이들은 주말에 얼마나 할 일이 많냐'며 흔쾌히 자원해 주셨던 부장님을 아직도 기억한다. 덕분에 내규에 의하면 저경력자인 신규 교사들이 가야만 했던 많은 일에 동원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생긴 문제를 발 벗고 나서 해결해 주시고는 이런 일 하라고 부장이 있는 거라며 생색도 내지 않았던 부장님을 여전히 기억한다. 덕분에 가시밭길 같은 교직을 감사한 마음으로 여전히 잘 걸어가고 있다.
그러니 나는 아직은,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다행인 것은 선배들에게 실망한 마음을, 또 다른 선배들이 위로해 주신단 점이다. 나는 그날 온종일 혼자 고민하다가 결국 평소 나를 아껴주시는 여러 선배님들께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선배님들의 따뜻하고 지혜로운 조언을 바탕으로 교감 선생님께 죄송하지만 확실한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고, 교감 선생님의 이해를 얻었다.
하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일하다가도 문득 걱정이 된다. 도대체 학교가 어떻게 되려고. 내가 뭐라고, 웃기는 일이다. 그럼에도 학교를 걱정하고, 공동체의 문화와 질서를 만들어가는 선배님들을 보며 오늘도 오뚝이처럼 일어난다. 좌충우돌해도 그런 선배님들이, 이토록 확실한 내 편이 있으니 아직은 괜찮다. 요 며칠 내게 위안이 되어주는 노래를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멀고도 광활하지만 바다와 맞닿은 나미브 사막을 떠올리며 다가오는 주말은 평온히 채워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