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없이는 못 살아.. 정말 정말 못 살아!!
입동이 지나면 이제 사람들이 서서히 한 해를 날 수 있도록 김장을 시작한다.
김장은 입동 지난 후에 담가야 맛있다는 말 때문인지 거즘 김장철이 11월 중순쯤 시작해서 12월 초면 다 끝내는 듯하다.
늦는 집은 12월 중순까지도 담그는 것 같다.
그 당시엔 김치냉장고가 발달하지 않아서인지
4도 정도 기온이 내려가야 맛있다는 말이 있어서가
아닌지 싶다.
음.. 그러니까 입김 나오고 손 시려워서 고무장갑 안에 면 장갑 끼고,
등짝에 핫 팩 붙이고, 배에 핫 팩 붙이고 나와야 할 정도의 온도.. 그 정도가 4도쯤 되지 않을까?
나의 김장 추억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너무 아팠다.
그 당시 엄마는 장남하고 결혼한 죄로 할머니랑 결혼 안 한 삼촌 2명 시집 안 간 고모 2명 이렇게 살고 있는 할머니집에 새벽에 나가셔서 할머니랑 둘이 김장을 600 포기를 하셨다..
김장이 하루에 끝나는 게 아니라 1 주일 내내 그렇게 고생하시는 모습을 보니… 김치를 그렇게 좋아하는데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무는 채칼로 쓸면 단 맛이 없어진다고 쌀 포대에 하나 가득 있는 무를 씻고 껍질을 벗겨놓고 또 그 무를 가지런하게 채 썰기를 하루종일
마늘은 물에 불려서 까면 마늘의 알싸한 맛이 없다는 할머니의 말씀에 몇 접시를 일일이 손으로 껍질을 다 벗겼다.
손이 갈라져서 쓰라려도 마늘 까기는 계속되었고 배추 절이는 건 말할 것도 없이 얼마나 고생인지…
김치 소 준비하고 만드는데 3일, 김치 절이고 물 빼는데 2일, 김치 양념 버무리는데 2일
1 주일 내내 그렇게 고생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나는 절대 김장하는 집으론 시집가지 말아야지 다짐 다짐을 하면서 살아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엄마의 김장은 끝나지 않았다.
삼촌도 결혼하고선 엄마의 김치가 맛있다며 엄마에게 김장을 종용하였고 고모또한 서울의 김치는 전라도 김치의 특유 맛이 안 난다고 “언니 김치 좀 담가서 보내줘요”라는 말에 엄마는
할머니에게 전수받은 김치 담그는 비법을 그대로 할머니의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만들어서 전달을 해야만 했다.
아빠는 갓 담근 김치를 선호하고, 언니는 묵은지를 선호, 각자 가족들의 취향이 다르다 보니 엄마는 매년 김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엄마의 김장의 양은 몰라보게 다이어트를 했다.
하지만 수십 년을 엄마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왔기에 나와 언니는 독립 이후엔 엄마에게 김장하지 말고 그때그때 제철이 오면 엄마 먹을 것만 조금씩 담가.. 우린 이제 사 먹을게라고 말을 하며
엄마에게 김장의 부담감을 내려놓게 했다.
양파김치, 고들빼기 김치, 고구마순 김치, 파김치, 부추김치 등등 지역별로 참 특이한 김치들도 많다..
내가 20대 때 잠깐 간호조무사로 일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원장님의 아버지 고향은 전북 격포였다.
격포의 김치는 우리가 봐왔던 일반 김치와는 전혀 달랐다.
빨갛게 양념된 김치가 아닌 회색빛 멸치 갈아 넣은 듯한 양념으로 뒤 덥혀있다. 정확히 말하면 젓갈에 파 묻힌 김치랄까?
처음 맛본 그 김치는 정말 너무 특이하고 뭐 이런 걸 어찌 먹나 싶을 정도였었다. 하지만 젓갈에서 나오는 그 비릿한 맛도 잠시
시간이 갈수록 감칠맛이 깊이 났다, 난 너무 맛있어서 원장님께 김치 좀 계속 가져오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고구마순 김치
더운 여름날 고구마순 김치에 물에 밥 말아먹으면 그 맛이 아주 끝내준다.
나는 이 김치가 지역별로 다 있는 줄 알았더니 고구마순 김치는 전라도에서만 먹는 대표 김치라고 하였다.
남자나 여자나 연애하면서 침대에서 옷 벗기기까지가 고단하듯 고구마순 껍질 벗기는 것도 만만치 않은 중노동이다.
하지만 한번 맛보면 계속 생각나고 멈출 수가 없다.
김치의 역사는 링크로 남겨둘 테니, 한 번씩 읽어봐유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3g2036b
올해 김장하는 대한민국 어머니들 힘내세요^^
저는 갓김치 무김치 배추김치 전부 좋아합니다. 김치 한 포기만 좀 맛보게 보내주실 분들 격하게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