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 누군가 캐나다 시댁에서 사는 저에게 "너의 시집살이를 정의해보라" 말한다면, 답은 이것입니다. 물론 어디에도 말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친정 식구들은 들으면 걱정할 테고, 제 사정을 알고 있는 친구들이 들으면 '배부르다' 할 테니까요. 맞습니다. 삼시 세끼와 딸아이 유아식까지 시아버지가 해주시는, 소위, '급식' 생활자에게 불평은 허락되지 않을 테지요. 하지만 배부른 돼지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습니다.
교집합을 별로 못 가진 동그라미의 외로움
남편을 알게 된 순간부터 해온 크고 작은 선택이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겠지요. 그 선택 중에 제 인생을 가장 크게 바꾼 것은 당연하게도 결혼과 출산이었습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닮은 구석 하나 없는 금발의 외국인과 결혼했고요. 그 덕에 한국에서 실질적인 '가장'이었던 제가 임신과 출산을 거치며 직장을 잃었으니 말입니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온 캐나다 시댁에서는 물 건너온 맏며느리를 따뜻하게 안아주셨으니 해피엔딩이겠지만, 여우 마을에 온 두루미의 마음이 편하기만 할 수 있을까요.
저와 하루에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을 동그라미로 그린 후, 같은 것이 있을 때 겹쳐 그린다고 상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집합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벤 다이어그램'처럼 말입니다. 머리 색, 눈동자 색, 쓰는 언어, 좋아하는 음식. 딱히 외로움을 타는 편이 아니지만,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는 동그라미로 살아가는 제 생활을 '고립'이 아니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아주 조금 외롭고, 아주 가끔은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되곤 했습니다.
가출에 한없이 가까운아주 작은 무엇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던(?) '가출'은 아주 작은 일로 현실이 됐습니다. 저야 부모님을 새로 얻은 운 좋은 며느리라 철없이 행복하지만, 남편은 다 커서 부모님과 살 비비며 사는 일이 쉽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유난히 지쳐 보이는 남편에게 "도망치자! 캠핑가서 며칠 쉬다올까?"하니, 눈을 반짝이더니 당장 짐을 꾸렸습니다. 부모님께는 "캠핑 가는데 언제 올지 모르겠다."며 센 척을 했고요. 차 안 가득 짐을 채우고 집을 나서는데, 시아버지가 조심하라며 토닥거리며 인사를 하면서 스윽 무언가 차에 실어 주십니다.
집에서 10분만 떨어져도 산과 들이 보이는 것은 어마어마한 행운입니다. 우리는 매일 이동하며 서로 다른 마을에서 네 번의 밤을 보냈습니다. 인적이 드문 낯선 곳에서 해가 지고, 별이 쏟아지는 것을 바라보고,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새소리에 깨어났습니다. 시아버지가 주신 과일 도시락과 음식 꾸러미는 가출(?) 기간 세 식구의 든든한 에너지원이 되어주었고요. 모든 순간이 마음으로 와서 에너지가 되어 채워졌습니다. 가출이라기에도 여행이라기에도 아주 작은 무엇이었지만, 큰 회복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어느 아침에는 자연스럽게, "이제 돌아갈까?" 하고는 남편과 마주보고 웃었습니다. 지칠 때 잔뜩 울어버린 것처럼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캐나다에도 한국에도, 어디에도 '우리 집'이랄 곳이 없어 때론 발밑이 빈 듯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내년엔 집 살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하다가 쓸쓸한 기분이 들면, "에이, 그래도 좋은 점도 있잖아!"하며 손가락을 꼽아가며 시댁 생활의 장점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다 보면 또 '그건 그렇지'하며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집합이 없으면 어떻고 이 생활이 고립이면 또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과 공간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고, 언제 끝나버릴까 불안해지는 '지금'이 매일 계속되고 있는 것을요. 아주 작은 도망을 마치고 돌아갈 곳이 있고, 그곳에 넉넉한 품을 가진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있어 참 다행입니다.
남편이 챙긴 식료품에 시아버지가 준 것을 보태자 4박5일이 풍성해졌습니다. 아이가 매 끼니 먹을 과일과 간식은 물론이거니와 팬케이크에 생크림도 얹을 수 있을 만큼 넉넉했습니다
이제 좀처럼 넘어지지 않는 아이는 행동반경이 넓어졌습니다. 호숫가와 마을을 온통 돌아보고, 끼니 챙기듯 놀이터에 갑니다. 아이 뒤를 따라다니는 것이 퍽 피곤하고, 꽤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