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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츠나 Aug 01. 2024

#6 도저히 행복하지가 않을 땐, 시어머니 밥상

산후 불안을 이겨내는 가장 극적인 처방에 대하여

드물게 행복하지가 않은 날이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행복한 날이 훨씬 더 많다는 뜻이니까요. 그런데 이 '드물게 행복하지가 않은 날'이 아주 강력합니다. 괜찮아, 나아질 거야 하는 어떤 주문도 통하지 않습니다. 온통 절망과 비극적인 상상뿐입니다.



도망쳐서 온 곳, 캐나다 시댁


저는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되는' 류의 시련에 강합니다. 특히 '우울' 따위의 구렁텅이에서 가만히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다스려, 소위 '살아남는' 일은 저의 특기지요. 그런데 이 '불안'이라는 정서는 꽤 진짜 같아서 영 현실과 구분이 어려웠습니다. 주위에서는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흔한 일일 뿐이라며 웃었지요. 전쟁 같은 거 안 난다고, 나면 어차피 다 죽는다고. 그러지 말고 상담을 좀 받아보라고요.  


그런데 이게 '산후 불안'이라고 하는,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되는 일인지, 아니면 진짜로 화재나 전쟁 같은 것이 코앞에 다가왔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댁이 있는 캐나다에 더 빨리 오고 싶었습니다. 친정 식구들은 아직도 '전쟁 무서워서 캐나다로 도망친 애'라며 놀리지만. 상상 가능한 비극으로부터 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이 집에는 T만 살고 있다


시댁에 오자 확실히 좀 나아졌습니다. 삼시 세끼 정성으로 차려주시는 시아버지와, 늘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시어머니, 말수가 적지만 다정한 시동생까지. 모두가 나와 내 아기를 지켜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든든한지요. 게다가 캐나다와 북한은 아주 멀고요. 그런데도 가끔은 도저히 행복한 기분이 들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그중에 또 가끔은 엉엉 울어버립니다.


그러면 시어머니, 시아버지까지 나서서 "햇빛을 쫴야 한다."며 온 가족이 산책을 나서거나, "운동을 해야 해."라며 집 근처 운동시설에 등록을 해주신다거나.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진단해 아주 바로 움직입니다. 저도 결국 비슷한 유형의 사람이라서 그런지, 웅크려 엎드려 하염없이 울고만 싶은 저를 이끄는 식구들의 해결책이 꽤 위로가 됩니다.



시어머니표, 치유의 밥상


그중에 가장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시어머니입니다. "난 너한테 뭐가 필요한지 알고 있지!" 하며 의기양양한 장난꾸러기의 표정을 짓고는 식탁으로 저를 이끌지요. 거기에는 늘 말도 안 되는 시어머니표 '밥상'이 있습니다. 난 네 편이야 하고 건네는 '위로의 밥상'이며, 네가 안 웃나 보자며 건네는 '승부'이기도 합니다. 저는 늘 그 승부에서 지고 맙니다.


키키키. 마주 보고 웃고 나면 또 남은 하루를 이어갈 힘이 솟곤 합니다. 이런 순간이 조금씩 모이면 비로소 이 '불안'이 '결국은 지나갈 일'임을 인정할 날도 오겠지요. 그때까지 조금씩, 아주 꾸준히. 시부모님이 내밀어주시는 작은 행복의 증거를 차곡차곡 모아두어야겠습니다. 이게 행복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어떤 날이 오면 다시 몇 번이고 꺼내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식사 담당 시아버지가 자리를 비우면 접시와 포크도 겨우 찾는 우리 시어머니. 시어머니가 차려준 '밥상'은 패스트푸드이거나 방금 비닐을 벗긴 과자일 확률이 99.9퍼센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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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오늘 처음 한 일 : 자기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면 "OK!"하고 말하며 기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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