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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츠나 Jun 25. 2024

#2 배가 아플 땐 크래커에 진저에일

우린 가끔 좀 안 맞는 것 같아 여보

캐나다에 살고 있는 저와 남편, 아이의 삼시 세끼는 시아버지가 해주십니다. 하지만 점심은 때때로 쉬어갑니다. 이 일정은 냉장고 사정에 따릅니다. 레프트오버(leftover)라고 하는, 전날 저녁 먹고 '남은 음식'을 각자 데워먹고 가볍게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찬스를 이용해 불닭볶음면처럼 이 집에서 저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곤 합니다. 오늘 점심은 불닭볶음면 찬스를 누렸고, 나머지 식구들은 어제저녁을 화려하게 장식해 줬던 새우오일파스타를 먹었습니다.



오늘의 저녁 메뉴 : 크래커, 진저에일


밥 먹고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함께 15개월 된 제 아이를 놀아주다가 갑자기 벼락을 맞은 듯이 복통이 시작됐습니다. 부모님은 점심때 무얼 먹었냐며 범인(?) 색출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범인은, 오직 저만이 먹었던, 불닭볶음면. 범인 검거는 무의미합니다. 이미 복통은 시작됐고 '저녁은 못 먹는 건가'하는 슬픈 마음이 저를 지배한 것을요.


아픈 배를 부여잡고 침대를 뒹굴다가 깜빡 잠이 들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 남편이 크래커와 진저에일을 건넵니다. "배가 아파서 이런 건 못 먹을 것 같은데?"하고 말하자 남편은 "배가 아플 때 원래 이런 걸 먹는 건데도?" 합니다. 한국말도 안 통하는 외제(?) 남편인 것을 늘 잊고 살다가 이럴 때 한 번씩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리도 다른 배경의 사람들인 것을.



문화장벽? 오히려 좋아


다른 피부색, 다른 머리색의 남편은 장점이 참 많습니다. 제 몫으로 사다 둔 불닭볶음면을 절대 축내지 않는다는 신뢰 같은 것 말입니다. 상대가 뭔가 부족하거나 어떤 잘못을 했을 때, 일단 그 개인을 탓하기 전에 '문화차이인가?'하고 일단은 나라 탓을 할 수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되는 뾰족한 말을 들었을 때도 "아, 내가 언어가 부족해 오해했겠지!"하고 언어 탓을 하는 것도 꽤 괜찮은 일입니다.


물론 모든 장점의 정확히 반대편에 같은 모양의 단점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남편 역시 저에게서 같은 것을 발견하고도 내색하지 않고 참아줬을 테지요. 배가 아파도 "배야 배야 낫거라." 노래를 부르며 배를 쓸어주지도 않고, 죽을 쑤어다 주지도 않습니다만. 저도 남편이 감기에 걸려도 입에 맞는 치킨수프를 만들어줄 수가 없으니 괜찮습니다. 일단 '나라 탓, 언어 탓' 해가며 장점을 즐기며 서로 기대 살아갈 수밖에요.



먹지 않아도 배부른 행복


우와와와와 하고 우다다다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와 남편이 놀이터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는 소리입니다. 두 사람이 돌아오는 소리에 설핏 잠에서 깨자 아이가 오랜만이라는 듯 손을 흔들더니, 라일락 조각(?)을 가져와 손에 얹어주었습니다. 부녀가 놀이터 옆에 핀 라일락을 보고 "엄마 보여주자" 하고 조금 뜯어왔을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습니다. 조각난 라일락도 향기는 온전했습니다. 저녁은 건너뛰지만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기분입니다.


둘만 시아버지 저녁을 얻어먹으러 부엌으로 가고 저는 침대에서 크래커에 진저에일을 먹었습니다. 크래커는 몹시 짜고 진저에일은 탄산이 강하고 달아서 맛있었습니다. 배가 아플 때 굳이 먹어야 할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혼자 침대를 뒹구는 기분만은 짜릿했습니다. 복통도 기쁜, 오늘도 행복이 넘치는 하루입니다.



이제 말을 배우는 아이는 얼마 전 '꽃'을 말할 수 있게 됐습니다. 놀이터 옆에 핀 라일락을 좋아하더니 기어이 한 줌 데려온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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