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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리 9시간전

수술실이 궁금하다구요?-2

이런 날도 있습니다.

올해는 의대 증원으로 인한

의료계와 정부 간 입장 차이가 커서 서로 타협 없는

대치 죠.

그러다 보니 대학병원 전공의 및 교수들 까지 파업으로 이어지고 있어 대병원들의 진료 및 응급수술이 무기한 지연되고 있어요.

그 여파로 제가 근무하고 있는

정형외과 질환, 외상수술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은 수술이 많이 늘었어요.

예전 대학병원 수술실에 근무할 때는

정형외과 전문병원처럼 규모가 작은 에서는

간단한 수술만 할 거라 생각을 했는데

대학병원에서 하는 웬만한 정형외과 수술과목은

다 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결혼과 출산으로 3교대가 어려워져 15년 근무한

대학병원을 퇴사하고 50 병상 정도되는  전문병원으로 처음 이직을 해서 출근한 날.

오래되었지만 그때의 첫인상을 잊을 수가 없어요.

'이런 작은 수술실 두 개로 이렇게 최소 기구와 세트, 수술장비, 이 적은 인원으로 이 많은 스케줄을

다 끝낼 수 있다고?'

'없는 기구도 많고 노후된 장비로 수술을 하고 직원들 간의 체계도 없이 각자 맡은 직무범위도 중구난방에 내가 어느 선까지 타협을 해 나가야 하는 걸까?'

'모든 청구물품은 원장의 사인이 있어야 하고

고가의 비용이 드는 건 무조건 보류되고 그 탓은

또 관리자에게 돌리는 이런 곳에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오너의 적극적인 동의나 지원 없이는

어떠한 적극적인 해결을 할 수 없는 곳에서

가 그만두지 않고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타협과 수용 외엔 없었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겠죠?


현재 근무 중인 이 병원은 4년째 재직 중이에요.

두 번째 근무했던 병원에서 의사, 스크럽으로 오래 손을 맞추었던 정형외과 과장님이 병원 오픈 할 때 '같이 가서 수술실 세팅하자'며 제안했고

그분이 지금의 원장님이죠.


오래된 인연으로 서로 편하게 대할 것 같지만

지극히 일 적으로만 소통하는

직위상하관계가 뚜렷한

언뜻 보면 대면대면해 보이는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 중이에요.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충분조건은

다르니까요.


그 짧은 4년 동안 여러 후배들이 입사와 퇴사를 반복했어요.

그중엔 이곳 시스템과 안 맞아 다른 곳으로 이직하기도 하고 우울증이 있어 퇴사하기도,

건강이 안 좋아 쉬기 위해 그만두기도 하고

각자 다른 이유로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졌죠.

이곳 수술실은 인원 8명으로 근무가 돌아가요. 스크럽 5명, PA 3명에 콜당직 월 10개 정도씩 근무하고 있어요. 유닛이 작다 보니 개개인의 장단점이 더 확연하게 보이고 멤버들이 한 명씩 바뀔 때마다 수술실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져요.

기존멤버와 조화를 잘 이루는 사회적 태도가 좋은 사람들도 있었고, 또 사사건건 부딪치고 문제를 더 일으키는 사람도 있었고, 근무년수가 쌓여갈수록

다양한 사람의 유형을 경험하고 또 대처하는 자세도 많이 늘어나게 되더라고요.


매일이 정신없이 지나가는 날들이지만

가끔 일하는 맛이 느껴지는 순간도 있어요.

올해 스승의 날였어요.

매일 하는 출근길

지문 찍고 수술실문을 여는 순간 발견한 풍선들.

'오늘 무슨 날인가? 이게 뭐지? 내 생일도 아니고..'

보라색 풍선마다 적혀있는 글자를 읽으며

'아~오늘이 스승의 날였구나.'

어제 퇴근길이 문득 떠올랐어요.

다들 퇴근시간이 되었는데도  나가지 않아서

 '나 먼저 퇴근할게' 라며 문을 열고 나오는데 뒤에서 뭔가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렸거든요.

'뭐 하느라 집에도 안 가고?'라는 생각은 했지만

'이런 걸 준비하느라 그랬구나'라며 고맙기도 하고

강제는 아니었지만 늦게 퇴근하게 한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후배들의 아침 출근 이벤트에

혼자 감동하고 있는데 출입문 벨소리가 들려서 나갔어요. 후배들이 케이크와 꽃다발을 들고 서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주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

mbti T답게 분위기를 깨고 던진 한 마디.

'눈물  마른 나를 울리려고?' 했더니

후배들이 울고 있어요. 자신들 노래에 감동하고 감동파괴하는 제 멘트였는데 오히려 뭉클하고 가슴이 아팠다고 하면서.

그동안 제가 지나온 이 오랜 시간들이

혼자서 외롭기도 하고 좋지 않은 말도 많이 들을 수밖에 없는 자리였지만  후배들이 어렴풋이 나마  읽어 주고 힘을 주는 것  같아서 너무 감사했어요.

가끔은 이런 날도 있기에

더 오래 이 직업에서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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