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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백하 Jun 19. 202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영화에 대한 공격

드라이브 마이 카보다 날센 영화 매체에 대한 공격

드라이브 마이 카(2021)

 (두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 존재,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악존않으로, <드라이브 마이 카>는 드마카로 약칭함.)


 <드라이브 마이 카>로 이름값이 매우 높아진 하마구치의 신작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봉 이틀만에 관객 수 만명을 기록하였다. 모 영화 커뮤니티에서는 하마구치 초반 오프닝으로 드마카 유입을 컷한다느니 이런 반응도 있었다. 하여튼 그러한 반응을 떠나서 <아사코>나 드마카 하마구치를 입문한 사람들에게 본 영화는 다소 당혹스러운 영화 구성의 변경으로 보일 여지가 충분하기는 하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악존않에는 드마카와의 매우 뚜렷한 접점이 존재한다. 악존않은 영화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드마카의 심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드라이브 마이카의 무성 지대

 가후쿠는 연극 연습에서 청각 장애를 지닌 유나와 재니스에게 서로 간의 ‘무언가’를 관객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대체 그 무언가는 무엇인가?


 드마카에는 직접적인 소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유는 윤수 부부의 식사 씬에서 시작된다. 윤수 부부의 식사씬은 굉장히 훈훈하게 묘사되나 한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윤수의 아내 유나는 윤수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러한 ‘간접적 소통’의 모습은 식사씬에 앞서 가후쿠가 아내 오토의 불륜을 알아채는 장면에서 묘사됐다. 가후쿠는 아내의 불륜 현장을 거울에 비친 상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 역시 불완전하다. 가후쿠는 거울의 상을 통한 간접적인 소통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아내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순간은 식사씬 이후에도 존재한다. 가후쿠는 다카츠키에게 텅빈 극장에서 그의 연기가 발전했음을 고평가한다. 그런데 가후쿠와 다카츠키의 소통과 대담을 통해 그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바로 다카츠키를 경찰이 연행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이것은 뜬금없는 상황이 아니다. 불량한 태도와 ‘계단을 올라가 촬영 가능한 사각형의 영역’에서 벗어나는 다카츠키의 행동이 분명 선행되었다. 허나 카메라는 공원에서의 다카츠키의 행적을 담지 못했다. 간접적인 매체의 태생적 한계일까?


 그리고 그가 미성년자와 교제 관계에 있었으며 공원에서 사람을 폭행했다는 사실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상을 통해 밝혀진다. 하지만 뉴스로는 활자화된 그의 불량한 모습을 전달받을 뿐 그의 또다른 이면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을 수 없다.


 여기에서 드마카에서의 연극이 사실상 영화(혹은 상)의 비유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 매체는 연극과 분명히 다른 매체이다. 그러나 연극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불특정한 다수를 통해 불분명한 무언가를 전달해야만 하는 숙명을 지닌다. 그것이 화면에 비치는 스크린의 상에서 비롯되는지 아니면 직접 행해지는 동작에서 비롯되는지의 차이를 지닐 뿐이다.


 앞서 묘사된 실패의 순간들과 미사키가 어머니를 죽이고 가후쿠가 오토를 죽였음에서 간접적인 행동은 결국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태도이기에 어떠한 변화를 자아낼 수 없다는 단출한 결론이 성립된다. 이 결론에 따라 가후쿠는 무너진 집 앞에서 “나는 더 고통받아야 했어”를 시작으로 거울의 상에 의지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자신을 규탄한다.


 사실상 영화 매체의 무의미함에 대한 성토인데 그럼에도 하마구치는 영화 막바지에서 이것을 다른 방향의 믿음으로 전환한다. 영화에 존재하는 두가지 무성의 구간이 그것이다.


 히로시마 원폭 돔은 45년 8월을 기점으로 더 이상 원래의 목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는 만신창이이나 전세계에 반전과 평화라는 ‘무언가’의 메시지를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히로시마 원폭돔은 두 장면 사이에 삽입돼 있다. 북해도에서 제시된 수직 시선에서 제시된 설원 무대와 빨간 차는 히로시마 원폭돔을 경유해 가후쿠가 유나의 수화로 이뤄지는 희곡을 통해 치유 받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영화라는 소통 방식은 만신창이이나 어쩌면 히로시마 원폭 돔처럼 무언가를 전달할 수 있는 실마리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실마리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수많은 반복이 이뤄질 고속도로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2024)

사람은 어디서 세상을 인식합니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드마카의 결론에서 더욱 확장된 영화로 극장에서의 영화가 가지는 수직성에 대한 것이다. 영화 극장이라는 구조는 의자에서 수직으로 이뤄진 벽의 연속된 잔상을 시청하게끔 하는 것이다. 인체의 한계로 인해 극장과 비슷한 현상은 어디에서 영화를 보든 발생한다. 오늘날에는 영화를 침대에 누워서 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화면이 몸의 방향과 직각으로 틀어져 있음은 점은 같다. (정수리에 눈이 달린 사람은 없다.)


 본작은 앙각으로 숲을 비추며 시작한다. 이때 수많은 나뭇가지들이 나열돼 있음을 볼 수 있다.


 시각에 있어서 통상적인 경우 사람이 물체를 인식하는 방법이란 오직 앞에 있는 물체를 바라보는 방법 밖에는 없다. 이 유일한 방법은 당장 눈앞의 물체만을 인식한다는 한계점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위치하고 있는 곳을 바꿈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전통적인 대지의 위에 서있는 존재가 아닌 저 하늘에 떠있는 존재로.


 일종의 부감을 극대화한 버드뷰 상태에서 세계는 입체감을 소실한 채 평면으로 추락한다. 세계를 어떠한 흑백의 평면 像으로 상정하였을 때 세상의 구분은 오직 지표에 그려지는 것으로만 존재한다. 이것은 항공 사진, 위성 사진, 지도 등 세상을 이차원 평면에 옮겨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이전과는 다른 방법이다.

 사진에 있어서 자연의 대지는 나뭇가지와 비슷하게 형성된다 수많은 물줄기들이 구간을 나누면 그 안의 땅은 같은 층위를 구성하는(다르게 말해 하늘에서 항공기로 내려보았을 때 사진으로 인화될 수 있는) 또다른 땅과 연결돼 하나의 대지-사진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부각이 앙각으로 바뀌었을 뿐 오프닝에서의 숲이란 결코 수직적이지 못하기에 지극히 비인간적인 상황이다. 이때 나뭇가지들은 마치 물줄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작업을 몇차례 반복해 지표의 상을 제시한 후 카메라의 높이를 낮추어 여러 층계가 화면에서 서로 중첩되게 해 그것을 강화한다.


 그러는 한편 오프닝에 버금가는 물체가 정적인 장면이 있으니 무궁화 꽃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비추는 장면이다. 이때도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물체를 지나가지만 앙각이나 부감 같은 비인간적인 시점 대신 측면의 지극히 인간적인 시점으로 그들을 촬영한다. 이로서 해당 장면은 오프닝과는 다르게 입체감을 가지게 된다. 그러한 입체감은 타쿠미의 차에서의 달리 아웃 – 도로 쇼트를 통해 즉시 평면적 영역과 조우한다.


 이러한 포석은 본편의 쇼트가 작동하는 데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롭다. 예를 들어 ‘타쿠미’가 그의 딸 ‘하나’를 숲에서 만나는 순간은 돌출된 땅에 가려져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마을 이장의 말을 빌리자면 상류에서 하류로 물이 흐르듯 그것은 당연한 이치의 영역이다. 수직선상의 묘사로는 어떠한 대지의 온전한 실체에 접근하지 못한다.


 또한 대지는 옹달샘을 통해 스스로의 상을 형성하는데 이것은 수직을 이용해 상을 형성하는 극장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영화는 세계의 진실을 담아낼 수 없는 매체라고 비웃는 듯이.


 반면 도시의 상황은 다르다. 도시는 시골과 달리 커다란 빌딩들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수직의 세계이다. 심지어는 통신 기술을 통해 공간을 넘어 상을 형성하는 능력을 내포한 공간이다. 이러한 물리적 장벽을 넘어선 평면의 존재는 그 자체로 자연과 부조화이며 동시에 지극히 불합리한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글램핑장 소개 영상이다. 글램핑장 소개 영상에서 카메라는 숲을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주시한다.


 도시인의 장면 중 그나마 조우에 가까운 순간이라 할 수 있을만한 고속도로씬의 경우 종종 환경파괴의 요인으로 뽑히는 ‘고속도로’라는 점, 인공물이 노골적으로 공간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조우가 아닌 일종의 기만책으로 보인다. 하여튼 고속도로의 경우 조우의 요소보다는 마치 산을 하늘에 상영하듯이 돌아가는 중앙분리대와 차선의 매우 규칙적인 반복이 더욱 눈에 띈다.


 이 시점에서 남는 건 하나이다. 그러한 기만의 시도가 성공이냐 실패냐의 문제. 연예사 직원들이 다시 시골로 찾아가 원주민들을 설득하려 하듯이 그러한 시도는 영화 후반부에서 계속해 이뤄진다. 그러나 아직 영화에 대한 대답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끝내 하마구치는 실패를 선택한다. 그 결과 결말부에서 수직상의 사람은 극명하게 대립하는 수평적인 들판에 쓰러져 몰락하고 평면적인 세계만이 영화를 지배하게 된다.


 이로서 드마카에서 제시된 무성 설원의 소통 가능성은 부정되고 차디찬 몰락의 가능성만이 남게 된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더 냉랭하고 무정하다. 드마카에서 영화의 가능성을 시사하던 고속도로 엔딩은 악존않에서는 쓰러지고 말 기만이다. 그럼에도 한가지 실마리는 남아있는데 수많은 시골 사람들이 하나를 찾아 수직의 숲을 빛으로 물들이는 장면이다. 과연 무언가를 평원에 똑바로 세울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것의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언젠가 하마구치가 이것에 대한 대답을 하는 날이 왔으면 한다.


드마카의 미봉책을 다시 개봉해 본질에 다가가려는 하마구치를 응원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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