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컨드에서 가장 극적으로 고조된 클라이맥스임을 믿어 의심치 않을 딸의 영화가 스크린에 펼쳐지는 지점을 전후로 영화의 인물 군상은 수상한 행동을 보인다. 딸을 찾아 나선 아비가 중공 선전 영화에 비친 1초의 상에 감탄하는 동안, 영사 기사는 보안부 사람들을 불러 그를 잡게끔 한다. 영사관은 그를 진정시켰다고 말하고는 자신의 공적을 채우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영사 기사가 아비와 나눈 대화가 모두 그저 살기 위한 가식이라 듯이 관객에게 보여진 행동은 영사 기사가 아비에게 필름 조각을 주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영화는 클라이맥스에서의 연출로 하여금 아비가 영사 기사의 목을 따겠다는 협박에서 비롯되지 않고 그에게 필름 조각을 선사했음을 넌지시 제시한다.
셜록2세(1924)
22호 필름의 상영을 아비와 영사 기사는 마치 <셜록2세>와 같이 작은 창을 통해 관람한다. 딸의 상을 찾던 아비는 영사실에서 창문을 통해 스크린에 비친 딸의 상을 보고 오열한다. 여기서 그가 무엇을 봤는지는 관객에게 제시되지 않는다. 곧이어 텅 빈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아비를 창문을 통해 지켜보는 영사 기사의 모습은 스크린 밖의 관객에게 상으로 전해진다. 아비가 본 딸의 모습은 재상영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재상영에서 영사 기사는 단지 선전 영화에 불과한 22호 필름을 아비의 딸로 재인식하게 된다. 관객이 아비가 본 딸의 실체를 맞이하는 순간과 영사 기사의 재인식을 겹치게 한 아비-영사 기사-관객의 일직선 구도는 사각형의 창으로 아비를 지켜보는 영사 기사로 하여금 내가 영화를 다룬 영화를 보고 있다는 걸 강조해 영사 기사와 관객을 동일시하게 만들고, 이와 같은 작동으로 영사 기사가 아비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음을 보여준다. <셜록2세>가 창을 통해 영화를 바라보는 영사 기사와 영화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일직선으로 제시했음을 떠올리면, <원세컨드>의 제시점이 셜록 2세와 가까움을 추측할 수 있다.
아비는 극장에서 두 번의 눈물을 흘린다. 첫째는 전술한 22호 필름이고, 둘째는 <영웅아녀>의 관람이다. 둘은 현저하게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22호 필름은 중공의 체제 선전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영웅아녀는 극 영화의 형태를 띠고 있다. 영화 형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비는 두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게 된다. 영웅아녀에서 친부와 딸의 재회는 22호 필름에서의 딸을 연상시키는 장면이다. 형식의 차이가 현저함에도 영화가 가진 ‘순간’에 아비는 감동했다. 우리는 아까의 일직선 구도를 통해 아비와 관객의 동일시 작업이 이뤄졌음을 알고 있다. 영화의 모습은 제각각 다르지만, 관객은 자신이 감동하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함을 안다. 원세컨드는 셜록2세가 그러하듯 영화로부터 현실로의 확장을 추구하고 있다.
우리는 원세컨드의 ‘순간’이 가진 두 가지 의미를 맞닥뜨리게 된다. ‘순간’으로서 소실되는 장면과 형식과 내용의 변화에도 동일한 감정을 끌어내는 메커니즘이다.
원세컨드의 시작은 거친 모래바람이 부는 씬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비의 딸을 담은 필름이 모래가 삼키며 모래바람은 재현된다. 사막의 모래바람이 영화의 시작과 에필로그 바로 이전을 장식했다는 점에서 수많은 영화에서 비정립적이고 비물질적으로 묘사돼 온 사막의 존재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다. 후반에서의 사막에 삼켜진 필름 씬은 처음에서의 장면만을 재현하지 않는다. 영화의 중반부에서 류가녀는 자신을 쫓아온 아비를 향해 빈 필름을 던진다. 이내 빈 필름은 사막에 떨어지게 된다. 빈 필름이 떨어졌던 사막의 장면은 영화 시작의 모래바람과 합쳐져 삼켜지는 필름의 소실을 영화에 보여주게 된다. 류가녀는 작중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이건 쓸데가 없다고.” 물론 류가녀의 말은 작중에서 전등갓의 재료로 쓸모가 없음을 의미하는 바로 쓰이지만, 빈 필름이 사막에 던져진 직후의 발언임을 생각하면 심상치 않다. 필름의 소실 이후 애타게 아비가 필름을 찾는 장면을 떠올리면 심상치 않음에 대한 의심은 한 층 더 커지게 된다. 빈 필름이 떨어진 사막은 형태를 갖춘 장소로 묘사된다. 반면 필름의 소실에서 사막은 형태를 갖추지 않은 비정립적이고 유동적인 장소로 묘사된다. 빈 필름은 어떠한 상도 비출 수 없고, 소실된 필름은 무언가를 비추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빈 필름처럼 사막은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지형이다. 아무것도 갖추지 않은 지형은 그 자체로서 영화로 작동할 수 없다. 영화는 동적인 움직임을 필요로 한다. 24프레임으로 만들어지는 순간순간이 영화를 영화로써 존재하게끔 한다. 필름이 1초 24장 눈앞에서 펼쳐지고 사라지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영화는 순간순간의 소실을 의미한다. 영화의 작동을 생각하면 빈 필름인 형태를 갖춘 정지된 사막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 영화는 동적인 움직임을 가진 움직이는 동적인 사막을 원한다. 그렇기에 영화 매체는 동적인 움직임을 지닌 사막의 존재를 바라보게 된다. 원세컨드의 후반에서 딸의 필름이 소실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럽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원세컨드는 소실되는 필름으로서의 영화로부터 시작하고 끝나지만, 영화의 상당에는 필름의 존재를 보여주는 동적의 사막이 없다. 영화 내내의 사막은 어떠한 장애물과 방해의 요소가 일절 없는 공활하고 넓게 펼쳐진 필름과 정적의 세계다. 정적의 빈 장소는 창작의 동기와 정점에 다다른 경지를 보여주고자 자주 쓰이고는 한다. 동적인 영화에 본질에서 벗어난 정적의 사막은 동시에 좋은 창작의 장소다. 오직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필름 위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그려나간다. 원세컨드는 정적 세계에서 영화 매체의 위대함을 칭송하고 그것을 추종하는 군중 무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영화 매체의 위대함을 칭송하고는 영화가 결국 소실됨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직시한다.
장예모 감독은 순간의 소실을 끄집어내 판을 키우고자 한다. 장예모 감독은 영화 원세컨드 인터뷰에서의 일문일답에서 필름에서 디지털로 변화하는 영화에서 ‘영화’란 정녕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있음을 밝혔다
정적의 사막에서 만들어진 작품 세계는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견고한 세계이다. 일직선 연출이 아비-관객의 구조가 아닌 아비-영사 기사-관객의 구조로 이뤄졌음을 기억하자. 영사 기사는 또 다른 영화의 관객이었다. 스크린 속의 스크린은 바깥 세계의 관객에게 영향을 끼치기 이전에 스크린의 작품 세계에 먼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전술한 일직선 연출은 현실 혹은 상층 세상과 통할 수 있는 균열을 형성하고 장예모 감독은 균열을 영리하게 이용해 순간의 소실을 스크린 속에서 필름 영화가 무너지고 디지털 영화로 대체되는 상황으로 끄집어낸다. 우리는 앞으로 필름을 보물단지처럼 여기는 군중의 모습이 세상에 등장하는 걸 상상할 수 없는 시대에 산다
아비와 류가네는 2년 후 에필로그에서 필름을 찾기 위해 사막을 다시 찾는다. 하지만 사막에는 필름이 없었고 아비와 류가네가 서서 정적인 사막을 바라보며 영화는 끝난다. 필름은 사라졌지만 아비는 2년 전처럼 분노하지 않았다. 그는 2년 전의 기억을 가지고 침착하게 앞으로 펼쳐질 빈 공간인 사막을 주시할 뿐이다. 비록 필름은 소실의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것은 기억과 하나의 정신으로 남아 새로운 빈 공간을 개척할 동기를 심어주었다. 1초는 사라지지만 정신은 영원했고, 필름은 사라지지만 디지털 영화의 정신을 형성했다.
정치적인 함유와 은유로 균열을 바라보면 한바탕 문화대혁명에 시달리며 빈 필름에 그려지던 세상은 결국 소실됐지만, 그 기억과 정신은 계승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된다.
원세컨드는 <드라이브 마이 카>처럼 영화 매체의 가능성과 불가시성을 지닌 무언가의 가능성을 찬양하고 희망을 놓지 않는다. 나는 그 가능성을 믿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