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프로파간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쓰이는가 하면 대부분 욕으로 쓰이기 때문에 이것을 칭찬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는 걸 저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지만은. 그럼에도 저는 칭찬의 의미로 쓰고는 합니다.
<탈주>는 대한민국 체제의 선전 영화로서는 근작 중 훌륭했다 그리 보는겁니다. (꼭 선전을 정부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영화에서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풀어나갑니다. 자유, 자유란 무엇인가 북한 체제는 얼마나 허황됐는가 식으로 그들의 체제를 까발리는 유형의 영화는 아닙니다.
본작의 북한 체제에 대한 탐구는 매우 한정적인 것으로 "남한은 하고픈 걸 도전할 수 있는 나라, 북한은 인생이 정해진 진부한 나라"라는 문구를 계속해 영상으로 보여준 것에 그칩니다. 여기에 하나 더하자면 "탈북자들은 이념적으로 건강하다"가 있겠네요.
꽤나 전형적인 선전영화인 것인데 그럼에도 한없이 유치해지는 길로 빠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선전영화이기에 납득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중간의 도적 떼나 북한의 피아니스트 이야기나 굉장히 뜬금없어 보입니다만 이 영화의 문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오히려 굉장히 합리적으로 배치됐다 그리 생각하는 겁니다.
일단 피아니스트 이야기의 경우 작중 구교환이 아끼는 동생이 탈북의 길로 가 상관한테 무어라 듣게 된 분노. 이런 종합적인 분노/체념의 감정과 엮어버려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문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말이죠.
아쉽게도 도적 떼는 봉합은 얼기설기로 된 느낌이 강합니다. 북한 인민들은 체제에 억눌리는 거지 실제로는 이념적으로 건강하다 그런 요소를 강조하려고 넣은 캐릭터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도적 떼와 탈북자 2인, 그리고 북한군이 펼치는 도주 시퀀스는 흥미롭습니다. 저 멀리 구교환의 위치에서 바라보는 손전등의 움직임, 도주자를 에워싸는 숲속의 빛. 너무 대놓고 인공적이라는 느낌이 난 덕택에 확실히 어색함조차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의 땅, 드넓은 평야에서 자동차가 움직이는 것도 마찬가지의 인상이었습니다. 주인공 앞으로 어디서 튀어나온지도 모르겠는 북한군 자동차 두 대가 너무 뜬금없이 멈춰섭니다. 자동차에서의 몸싸움은 하필 북한의 기만적인 선전 문구를 들이박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결국 모든 프로파간다 영화란 (꼭 국가일 필요는 없는) 집단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물로서 거대한 가상의 틀을 요구합니다. 여타 다른 극 영화도 크게 다를 건 없지만 직접적인 프로파간다 영화는 가상의 무대가 굉장히 강조될 수밖에 없는 한계이자 특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뒤집어 접근하는 것도 재밌습니다. 예를 들어 1987년作 호주의 다큐멘터리 영화 <선전의 포로들>은 일본군이 2차대전 당시 만든 <호주가 부르다,Calling Australia>라는 선전 영화의 인공성을 추적해나갑니다. (감독은 조선인이었습니다.)
앞서 탈주의 어색한 요소들이 상당히 잘 배치됐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의 칭찬입니다. 대놓고 가짜인 티가 풀풀나는 무대를 설정해놓고, 거기에서 어떻게 요소를 배치해 문구와 집단 총체의 의지 반영을 최대화할 것인가. 탈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추격전의 긴장감은 있을지언정 보는 내내 자유를 갈망하며 보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저 문구는 오늘날 너무 당연하니까요. 정부 주도도 아닌 상업영화인 탈주에 사회 총체가 반영됐다면 바로 이런 의식일겁니다. 우리는 이미 북한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고요.
진짜 자유를 갈망하며 본 영화는 최근 영자원에서 본 <공적명령>이 되겠습니다. 억울하게 잡혀와서 울며 배급받은 감자칩과 콜라를 먹는 장면이 어찌 그렇게 처량한가.
공적명령은 영화 중간 중간에 위에서 바라본 지붕과 지붕 위를 걷는 군인을 보여줍니다. 철장 레이어가 더해진 장면들이 많은데 억울한 민간인들이 갇혀있을 때 군인들은 그 위를 활보하다는 엄청난 답답함을 선사하지요.
민간인들이 무혐의로 풀려나고 엔딩은 지붕 위에서 마을을 보여주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게 한 만큼이나 마지막의 해방감도 그만큼은 느낄 수 있던 작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