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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백하 Oct 13. 2024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 후기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

 솔직히 말해 본작을 비롯한 우마무스메 시리즈는 씹덕풍의 작품이고 현실의 말을 전부 미소녀 캐릭터로 대체해 버린 어찌 보면 생뚱맞고 우스워 보이는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는 이야기로 시작하자. 나름 그런 향의 정서를 뺀다고 뺀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쪽 정서에 면역이 전무하다면 몇몇 장면에서는 눈살을 찌푸릴 여지도 많다. 애니메이션이 영화로서 결코 작용할 수 없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게임 극장판 애니에 또 환호성을 보내기는 여러모로 거부감이 드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 영화가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있지 않은, 소위 일반인들이 보았을 때 느낄 수 있는 어색함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자. 현실의 말들을 미소녀 캐릭터들이 대체해 나타나는 어색함보다는 그 대체함에서 나오는 효과가 이 영화가 현실 세계를 극복하는 방식과 상당히 조응하고 있음에 방점을 두고 싶다. 본작에서 명확히 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매 구간 정보를 제공하는 경기장을 담은 버드뷰의 화면을 가득 메우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경기장이라는 공간.

 경기의 반복, 수많은 사람들이 놓인 관중석에서 화면을 차지하는 드넓은 화면 즉, 거대한 잔디 평원을 형성하는 경기장 내로의 카메라 전환으로 시작한 이 작품은 철저하게 넓은 대지의 공간을 형성해 나간다. 영화 내내 경기 장면마다 땅이 울리는 장면이 계속된다. 이때 대지의 공간에서의 인물이란 무언가를 추월하기 위해 단지 달린다는 한 가지 의미 외에는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한 채 땅과의 상호작용을 나눌 뿐이다. 추월을 향한 전진과 상당수의 인물 간의 상호작용은 땅을 벅차고 나아감에서 발생하며 인물 간의 상호작용 또한 상당이 땅의 상호작용 — 흙과의 얼굴의 만남 같은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이 펼쳐지는 경기장의 모습이란 매번 같을 뿐 이라 그 자체로는 어떠한 특정한 사건을 가리킴을 확실히 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그곳은 기껏해야 관중석으로 바깥과 안을 나눌 뿐이며, 경기장 안에는 그들을 명명할 구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에 의미를 부여함은 날씨와 잔디 상태, 그리고 지금 저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보하는 거대한 자막으로 이루어진다. “제팬 컵, 날씨 맑음, 잔디 양호.” 이 세 가지 정보의 명시는 영화가 지극히 단선적인 이야기: 우마무스메 경기를 보여줄 것임을 매번 역설한다. 그 결과 수많은 똑같은 이야기의 반복이라는 본 영화의 요소는 매우 뚜렷한 모습을 지니게 된다. 이 단순함이란 이 영화의 반복을 드러내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우마무스메 프리티 더비: 새로운 시대의 문> 中 아그네스 타키온.

  본작에서 평원이 하나의 상호작용의 거대한 매개체라면 평원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우마무스메라는 게임 IP를 그다지 즐기는 입장은 아니지만 맨 처음에 말하였듯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실재하는 말들을 기반으로 형성한 가상의 대안 인물이라는 사실 정도는 분명히 할 수 있겠다. 말이라는 동물이 없고 대신에 우마무스메라는 인간의 아종이 존재하는… 약간은 당혹스러운 설정의 세계에서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움직이는 말’의 이미지 역시 인물들이 그러하듯 움직이는 우마무스메라는 대안적인 이미지로 변경된다. 움직이는 말의 이미지란 결국 말과 사람, 땅으로 이뤄진 현실의 반영물이다. 이때 땅이라는 존재는 현실의 존재를 대안적인 이미지로 만드는 데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개념 중 하나다. 적어도 동물의 움직임을 담는 데에는, 특히 그것이 경마라면 더더욱 땅이라는 공간의 형성이 요구된다. 근작 중에는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가 이러한 가상 공간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영화이다. 다만 매드맥스의 경우 잔디가 흩날리는 평원이 아닌 모래가 흩날리는 거친 사막이라는 점이 다르겠다. 퓨리오사는 호주 대륙의 가운데에 낙원 ‘그린 랜드’가 존재한다는 보편적인 호주 대륙의 건조 기후 지대라는 지리적 통념을 아득히 넘어버리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진행된 선전포고로 가짜 사막이 영화 내에서 모든 걸 대체해 버렸음을 선언한다. 가짜 사막은 현실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반면 우마무스메 영화는 이러한 언질을 구태여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말을 아예 대안으로서 내세워버린 IP 자체의 거대한 설정은 곧 퓨리오사에서 지도를 친절히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중대한 가상 세계로의 대체 선언으로 작용한다. 아직 의아한 부분이라 논의를 전개함에 조심스럽지만 이것은 단지 필름 덩어리를 보면 흥분하는 (딱히 스스로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면서도) 자칭 영화 팬의 이상한 흥분일지도 모르겠다는 일말의 의구심을 품은 채로 몇 가지 장면을 생각해 본다. 그녀들의 각성 장면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필름의 편린. 그리고 그 필름의 선들이 모여져 새로운 면을 형성하는 장면.(타키온) 그 면을 거대한 평원의 안내서라고 보아도 되겠는가? 영화 역시 일련의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뤄진 환상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이 무대에 서 있음은 당연하리라는추측이 성립한다.

  영화의 주요 인물인 타키온은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우마무스메에게 압도적인 속도를 보여준다. 그런 타키온은 광속을 능가하는 가상의 입자, ‘타키온’을 직접 언급하며 자신의 이름이 무슨 뜻인가를 독백한다. 뜻풀이 맞추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재밌게도 타키온이라는 그 입자는 어디까지나 이론의 차원에서 존재할 뿐이다. 만일 타키온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세계 무엇과도 상호작용할 수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타키온을 붙잡음이 얼마나 허황된 가상의 이야기인가. 영화 속 우마무스메 캐릭터의 모델이 된 현실의 말 타키온이 존재했다. 실재하는 타키온은 영화와 달리 발목 부상으로 인한 그다지 좋지 못한 은퇴라는 결말을 맞이한다. 이것은 영화에서는 갑작스러운 은퇴 선언이라는 다소 당황스러운 이벤트로 변주돼 전개된다. 은퇴선언 이후 주인공 정글 포켓이 승리를 거머쥐는 제팬 컵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승리한 정글 포켓의 포효 속에서 타키온은 나 대신 목표를 이뤄냈으니 됐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그걸로 정말 만족하냐는 스스로에 대한 일말의 동요를 가진다. 하지만 그 동요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목구멍 속으로 가라앉는다. 현실에 대한 가상의 굴복 선언 ~ 그곳에서 정글 포켓은 최강이 되며 타키온이 아무런 상호작용할 수 없음을 그리고 현실이 그러하였듯 처참히 이 세계가 철저히 패배하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반전의 서막이 펼쳐진다. 정글은 제팬 컵 우승으로 최강이라는 칭호를 얻게 됐으나, 타키온 없는 승부, 결국 그의 질주를 이기지 못한 승부라는 점에서 그녀는 스스로가 최강인지를 자문한다. 그리고 그녀가 환영으로 묘사된 현실이라는 초월을 향한 가짜 이야기를 가로막는 적을 깨부수는 순간, 현실에서는 사라졌을 타키온의 복귀라는 새로운 서사의 추가로 그 모든 이전의 굴복을 무너뜨리고 만다. 또 다시 매드맥스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본작의 서사란 강렬한 나미비아의 모래사막에서 펼쳐진 끝내주는 액션을 앞뒤로 배치된 모래 폭풍과 가짜 산맥이라는 cg의 결정(結晶)이 그러하듯 결국 시타델과 이 사막은 가짜라며 가짜 사막의 공격으로 막을 내린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진짜 사막에 대한 선전포고를 감행해 가짜 사막으로의 완전한 전환을 이뤄낸 퓨리오사로의 이행 과정을 보는 듯하다. 이 긍정 과정은 전술한 단선적인 이야기의 반복을 통한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이뤄졌다. 그 덕택에 우마무스메는 거의 동일한 배경, 동일한 목표를 다루는 매우 유사한 장면 중에서 그 차이를 명확히 할 수많은 순간들을 묘사하는 데에 성공하게 된다.

 이 단선극은 매우 명쾌한 것이라 올해 개봉한 영화 중 매우 반복적인 이야기를 보여준 축에 속할 영화인 빔 밴더스의 퍼펙트 데이즈가 보여준 지나치게 일정한 화장실 청소의 일상과 함께하는 붕괴의 징조가 만연한 세계보다 새로운 시대의 문의 세계가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세계는 스카이트리의 권능을 재확인하며 존재하는 세계지만 이곳은 평면만이 존재하는 공간이기에 어떠한 수직적인 권능의 재확인을 요구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종종 비춰지는 거대한 관중석이라는 경기장의 안팎을 가르는 장벽조차 수평적인 구조물이라 그 누구에게도 나의 존재를 확인하라는 위압감을 주지 않는 차원에서 작용한다. 그럼에도 그 장벽의 존재로 안에 발생한 거대한 땅이라는 인공적 공간은 확실히 모두에게 상호작용의 매개체로서 존재한다. 이런 지점에서 영화가 도시라는 공간을 형성하는 얘기를 땅에서부터 시작한다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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