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 이미지 1.
벽이라는 것은 단절을 묘사하는 데에 유용한 사물이다. 당연하지만 유리는 여타 사물과 달리 유리만이 가진 투명함이라는 성질을 가진다. 그러므로 유리로 이뤄진 유리벽은 벽 너머 물체를 볼 수 있는 투명성을 보장하나 동시에 단절을 표현할 수 있다는 특수성을 가진다.
다음은 영신 키아로스타미의 명작 체리향기다.
#1
자살을 결심한 한 남자는 자신의 자살을 도와줄 이를 찾고 있다. 그가 원하는 자살 조력이란 밤에 수면제를 먹고 한 구덩이에 들어가 있을 테니, 자신이 죽었으면 나가는 걸 도와주고 죽었으면 흙으로 덮어달라는 내용이다.
남자는 경비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경비원은 벽으로 들어가고 남자는 흙더미를 바라본다. 결국 흙 속으로 들어갈 자신의 처지를 미리 봤다는 듯.
자살을 결심한 남자는 경비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나 동시에 벽으로 유리돼 있는 상태이다. 흙먼지로 뒤덮인 유리벽 너머는 죽음의 영역이라 볼 수 있다.
유리벽을 빙돌아 한가지 경비원에게 말을 건낸다. “혹시 나랑 드라이브할 생각이 있느냐.” 알다시피 드라이브라는 건 자살을 도와달라는 죽음에 관한 제안이다.
남자가 유리벽 앞에서 맴돌았음에서 인물이 자살 조력을 부탁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고 있음이 묘사되었다.
경비원의 거절로 드라이브에 대한 기대가 좌절되자 남자는
다시 흙먼지의 세계로 돌아간다.
#2
아프간에서 온 유학생에게 남자는 자살 조력을 제안하나 유학생은 자살이 꾸란에 제시된 죄악임을 들어 제안을 거절하고 그에게 자살하지 말 것을 부탁한다.
유학생은 자신의 친구가 오믈렛을 했다며 같이 식사하자고 남자에게 제안한다. 남자는 자신은 계란 요리가 싫다며 그의 청을 거절한다. 이때 유학생과 남자의 사이에 유리벽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는 아직 이승에 남을 생각이 없다.
그렇게 남자의 공간은 황무지로 떠난다
#3
본인의 직장인 박물관에 가는 노인은 남자에게 자살하지 말 것을 강권하나 그럼에도 병원비를 이유로 그의 제안을 수락한다. 노인을 박물관에 내려주고 갈 길을 가던 남자는 무언가를 문득 생각해내고 다시 박물관으로 향한다.
남자는 유리창 너머 매표소로 노인이 일하는 곳을 물어본다. 유학생이 질문의 주체였던 #2와 달리 이번에는 주인공이 문답의 주체가 된다. 또한 삭막한 바깥 풍경 대신 순서를 기다리는 밝은 인상의 여성이 남은 여백을 차지하고 있다.
#4
#4에서 묘사되는 유리벽은 #1과 유사하다. 하지만 남자의 태도는 다르다. 공간을 단절시키는 유리벽을 돌아 말을 건넨 첫번째 장면과 달리 유리벽과 수직으로 마주본다. 그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한다.
남자는 노인을 불러내 한가지 부탁을 더 얹는다. 혹시 내가 자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돌 몇 개를 더 던져달라고.
이처럼 유리벽을 통해 인물의 태도 변화를 알 수 있었다. <체리향기>는 유리벽 뿐만 아니라 주변의 풍경이 바뀐다든지 하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인물의 심리를 묘사하니 이러한 방식에 주목해 보면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본다.
(2024년 2월 26일에 작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