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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산책 Jul 11. 2024

겉과 속의 다름에 대해서

 ‘퍽 즐겁다’는 어떤 즐거움일까. ‘퍽’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더니 ‘보통 정도를 훨씬 넘게’라고 한다. 그럼 퍽 즐겁다는 건 상당히 즐거운 상태를 의미하는 건가 보다. ‘퍽 즐겁다’, ‘퍽 슬프다’, ‘퍽 맛있다’ 단어가 주는 어감은 어딘가 냉소적인 느낌이 있는데, 본 의미를 강조하는 역할이라니 겉과 속이 다른 말 같다.


 우리는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에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지루한 친구의 말을 재밌는 척 듣는다던가, 미운 직장 상사에게 웃어 보이며 업무를 도맡아 처리하겠다고 할 때처럼 말이다. 우리는 부정적인 것, 떳떳하지 못한 걸 숨기기 위해서 겉과 속을 달리한다.


 반대로 긍정적인 걸 숨기기 위한 경우도 있을까? 연애 초반,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너무 앞서가는 자신의 마음을 아닌 척 숨긴다거나, 나에게 좋은 일이 있었는데 힘든 시기를 겪는 친구 앞에서 굳이 티를 내지 않는다던가 하는 일이 있을 것 같다.


 겉과 속을 달리해서 지킬 수 있는 평화는 그 비밀이 탄로 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자의든 타의든 그 비밀이 탄로 났을 땐, 오히려 대놓고 자신의 마음을 보였을 때보다 더 큰 상처 혹은 혐오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면에서 사람은 너무 많은 걸 알 필요가 없고 알려고 해서 별로 좋을 것이 없을 수도 있다.


 상대방에게 이 비밀을 간파당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두 가지가 있는데, 상대방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점과 내가 그러한 마음을 가진 것에 대한 이유를 상대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겉과 속을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어쩌면 모두가 덜 피곤하고, 덜 상처받는 세상일지도 모르겠다.


 겉과 속이 다름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할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유통기한이 점점 짧아지므로 관계의 거리에 따라 유통기한이 정해진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린 때때로, 이 거리에 따라 상대에게 나의 속을 보여줘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지하게 되는 상황이 있는데, 이를 ‘가면의 유통기한을 알아챘다’라고 표현한다.


 자신의 가면을 지키기 위해서는 관계를 멀리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면을 내려놨을 때 상대가 받을 상처 혹은 그로 인한 나의 부끄러움 때문에 유통기한이 임박할 때까지도 쉽게 가면을 포기하지 못한다. 혹은 유통기한이 지난 가면을 계속 쓴 채로 상대를 마주 할 때도 있다. 어딘가 찝찝하고 불편한 느낌이 드는 관계는 여기서 오는 불편함이다. 따라서 가면을 지키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관계를 멀리하는 것이다.


 나는 인간관계에서 주로 가면을 지키는 쪽을 택해왔다. 가면을 벗을 시기가 되면, 조금씩 상대방과의 거리를 벌리곤 했다. 별 일이 없는데도 약속을 피한다던지, 먼저 그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던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내가 맺은 인간관계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내가 거리를 벌리면 나를 떠나는 사람, 거리를 벌린 만큼 나와 거리를 유지하는 사람, 거리를 벌렸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


 나와 거리를 유지한 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상시 적절한 거리가 유지되기에 나를 더 보여줄 필요가 없어 편하다. 그러나 관계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가면의 부채감이 점점 커지기 때문에 언젠가 나를 떠나보내거나 나와 가까워지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따라서 ‘나와 거리를 유지한 채 떠나지 않는 사람’은 언젠가 0에 수렴하게 된다.


 내게 더 다가오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자가 내게 다가오면 올수록 나는 나의 가면이 불완전하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가면을 지키기 위해 또다시 상대방과의 거리를 벌리지만, 이 과정에서 그와 싸우게 되고, 싸우는 도중에는 가면이 조금씩 깨져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맨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가까워지면서 서로 상처를 입은 탓일까. 우린 서로의 가면이 벗겨졌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서로의 옆에 존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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