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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빈 Jul 22. 2024

"규칙은 규칙이지"

완고한 독일인들. 그 속에도 따뜻함은 있(을 수도 있)다. 


“Rules are rules.” 독일인의 성향에 대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일 것이다. 규칙은 규칙이니, 예외 상황이란 없다는 것이다. 베를린 도착 첫날, 공항 도착서부터 심상치 않은 독일인들의 비융통성을 느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서 베를린행 비행기 탑승시간까지 30분이 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필 많은 국제선 도착이 겹친 탓인지 다음 게이트로 가기 전, 출입국심사의 줄이 어마어마하게 길었다. 못해도 두시간은 꼬박 기다려야 할 듯 했다.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말잘듣는 우리 한국인들은 다음 비행 시간이 넉넉한 것인지 아님 포기한 것인지 줄을 순순히 서고 있었다.


다급해진 나는 공항직원을 잡고 다음 비행기 시간이 30분도 안 남았으니, 혹시 빨리 들여보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 직원은 다른 직원과 짧게 이야기를 끝낸 후, 그럴수 없다고 대답했다. 보통 다음 비행기가 30분도 안남았다고 하면 다른 공항에서는 먼저 갈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데 (그러라고 공항직원이 거기 있는것 아닌가?) 역시 독일. 국물도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쌈닭 모드로 돌입하는 수밖에. 한껏 전투태세를 갖추고, “그럼 내가 다음 비행기를 놓치면 어떻게 할 건데? 이미 떠난 것도 아니고, 이 줄만 통과하면 탈 수 있는데 그걸 나더러 놓치라고?” 쏘아대니, 공항직원은 어깨를 으쓱하며, “네가 만약 비행기를 놓친다면 서비스센터가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도와줄거야.”라는 어이없는 말을 당당하게도 한다. 말도 안돼. 내가 이 자리에서 왜 독일의 경제가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는지 일장연설을 해, 말아. (그 이유는 너희같이 융통성 없게 일하는 사람들 때문이야!)


벙쩌 있는 나에게 다른 공항직원이 다가온다. 조금 더 높아보이는 직원이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다시 설명했다. 그는 내 티켓을 보더니, “A 게이트는 Z 게이트 바로 옆에 붙어있어. 여기서 기다리지 말고 Z 게이트 쪽으로 가면 빠를 거야.” 그에게 큰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허공에 고맙다는 인사를 외치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미로 같은 공항을 휘적이며 다니다 보니 (그와중에 간판은 한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도 표시해놓은 독일인들의 꼼꼼함에 감탄하며) 어느새 출입국심사대에 도착했고 그곳은 대기인원이 단 한명도 없었다.


무사히 비행기에 오른 나는 왠만하면 “예외 상황”을 만들지 말자라는 결심을 하는데 우리의 인생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토요일 아침, 슬슬 청소를 하고 자리에 앉아 글을 쓰려던 찰나, 아랫층에서 벨이 울린다. 일단 독일어가 안되니 문을 열어주고 봤는데, 마음 좋아보이는 DHL 택배 아저씨가 다가왔다. 독일어로 짧게 뭐라고 얘기하더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돈 안내고 뭐하냐는 눈초리다.


모든것이 아날로그인 독일에서 DHL 아저씨가 카드기계를 갖고 다닐리 만무하고 잔돈까지 정확히 현금으로 구비해둬야 했다. 집주인에게 소포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가 없던 나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택배아저씨는 이웃들에게라도 도움을 청해보라고 한다.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벨을 울리기 시작했다. 감감무소식에 머리를 부여잡기 시작하는 택배 아저씨. (마음이 좋은 아저씨였기에 망정이지 보통의 독일인들이었으면 떠나버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금 돌려보내면 이건 반송될게 분명하다. 불굴의 한국인으로서 이 택배를 받고야 말겠다. 갑자기 어디선가 사명감에 불타오르며 DHL 아저씨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현금인출기에 가서 돈을 뽑아오겠다고 했다. 흘러내리는 안경을 붙잡아가며 부리나케 현금을 찾아왔더니 이번에는 잔돈이 문제. 우리의 옥신각신을 듣고있던 상점 주인이 나와서 잔돈을 바꿔주겠단다. 결국 DHL 아저씨도 나도 웃으며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상점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던 찰나, 그녀가 대뜸 그런다. “왜 진작 현금 좀 빌려달라고 하지 않았어? 이 건물에 산다며?” 아… 그런 방법이 있었지. 생판 남인 나에게 이 돈을 누가 빌려주겠냐 싶어 사실 도움을 청할 생각도 못했다.


두개의 사건을 겪고 나니 독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한가지 팁을 얻은 듯 하다. “Rules are rules, but ask for help, at least.” 독일인들은 규칙에서 벗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규정대로 해야하고, 규정을 어기면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뤄야 한다. 그러나, 예외의 상황인 경우, 적어도 누군가에게 도움은 청해봐야 한다. 딱딱해 보이는 독일인들도 알고 보면 따뜻함이 있을 수도. (무조건 있을 것이라는 장담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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