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에는 가끔 과천에 있는 현대미술관을 찾곤 했다. 서울대공원 옆에 있는 현대미술관은 북적이는 대공원과는 달리 대체적으로 한산했다. 작품들이 있는 공간 안에 고요히 머무는 것만으로도 여유와 평온을 느끼곤 했다. 그 시간들은 심상한 마음에 위로를 건네기도 하고 쉼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작품들은 대부분 추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작품을 해석하기보다는 오감을 열어 작품들이 건네는 느낌 속으로 경계 없이 스며들었다.
여행하는 도시에 미술관이 있으면 먼저 검색을 해 보고 관심 있는 작가의 작품들이 컬렉션 되어 있다면 가능한 한 방문을 한다. 하지만 그림 덕후까지는 아니라서 아무리 대형미술관이라고 해도 관람시간은 최대 3시간을 넘지 않도록 한다. 3시간이 넘어가면 집중력과 체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런던에서 3일째 되던 날 아침, 코톨드 갤러리에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도로가 촉촉하게 젖어 있는 걸 보니 밤새 비가 내렸던 모양이다. 템플역에서 내려 템즈강을 따라 걷다 보니 외벽에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 <폴리 베르제르 바>가 프린트된 현수막이 붙은 건물이 보였다. 단번에 코톨드 갤러리임을 알았다.
소규모 미술관중 가장 아름다운 미술관으로 평가되는 코톨드 갤러리는 런던의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무료인 것에 반해 유료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갤러리의 매력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알토란 같은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 오르세의 미니미라고나 할까. 게다가 체력의 부침 없이 기분 좋게 감상할 수 있는 규모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다.
코톨드 갤러리는 서머셋하우스에 위치해 있는데, 16세기 서머셋 공작의 집이었던 것을 현재는 예술 분야를 위한 복합 문화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갤러리에 들어서니 아담한 로비에 서너 명의 직원들이 서서 반갑게 맞이했다. 락커에 가방을 넣어두고 천천히 작품들과 만났다. 초기 르네상스부터 19세기 인상주의까지 폭넓은 시대를 담고 있었다. 갤러리 외벽에 붙어 있었던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바>와 리플릿 앞면을 장식하고 있는 고흐의 <귀가 잘린 자화상>이 갤러리가 자랑하는 대표작인 듯했다.
오래전 인상주의에 대한 책을 읽으며 만났던 마네의 작품 <폴리 베르제르 바>.
작품 가운데 서 있는 젊은 여성의 살짝 내려 뜬 눈빛에서 고단함이 느껴졌던 순간을 기억한다. 여성 뒤의 거울에 비친 왜곡된 모습에 대한 의견들도 분분하지만 늘 여성의 자세와 표정에 눈길이 오래 머물 곤 했는데 그 원작을 마주하는 즐거움이라니. 게다가 당시 시대의 주류와 평가를 개의치 않은 듯한 마네 특유의 당당함을 담아낸 작품들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해학과 시원함이 느껴졌다. <올랭피아>가 그랬고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그랬다.
마네를 비롯해서 고흐, 모네, 드가, 쇠라 등 많은 작가들의 작품들이 있었지만 툴루즈 로트렉의 작품들을 만난 것 또한 귀한 시간이었다. 귀족 가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장애가 가져온 결핍과 아버지로부터의 정서적 학대, 끝까지 모성애로 품어준 어머니. 그의 짧았던 생애를 들여다보게 되면 그의 작품을 좀 더 깊게 만나게 된다. 그의 초록색은 건드리면 아픈 멍처럼 늘 그렇게 다가오곤 했다.
코톨드 갤러리에서 나와 로열오페라 하우스를 지나 피커딜리 광장으로 가려는데 마침 ‘런던 사이클 대회’가 있는 날이라서 도로 곳곳에서 차량뿐만 아니라 보행도 통제가 되고 있었다. 일요일을 맞아 가족단위로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수많은 자전거 라이더들이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피커딜리 광장으로 가다가 홍등이 하늘을 수놓은 차이나타운을 지났다. 차이나타운을 상징하는데 이만한 아이덴티티도 없을 것 같다. 아무튼 대단한 차이나.
피커딜리 광장에서 벗어나 한식 레스토랑을 찾아가는 길에 작은 LP가게를 지났는데 쇼윈도 안에 놓여 있는 에이미 와인 하우스의 사진이 발길을 잡았다. 2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다는 사실이 새삼 쓸쓸했다. 참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하는 에이미를 런던 한복판에서 이렇게 사진으로 조우하다니. 어느 날 문득 그녀의 노래를 들을 때면 이 순간을 꼭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한식 레스토랑에 비빔밥을 먹기 위해 들어갔는데 주인이면서 주방을 맡고 있는 사람은 인도계로 보였고 서빙은 20대로 보이는 일본 여성들이 하고 있었다. 비빔밥의비주얼은 그럴듯했는데 맛은 많이 아쉬웠다. 그아쉬움은 파이브가이즈에 들러 밀크셰이크의 달달함으로 대신했다.
오래도록 대영박물관으로 불렸던 영국박물관을 오후시간으로 예약해 뒀었다. 무료입장이니까 그냥 줄을 서서 입장하면 된다는 의견들도 많았지만 혹시나 싶어 시간예약을 해두었는데 하길 잘했다는 것을 박물관 앞에 도착해서 알았다. 관람객이 많아서인지 예약자에 한해 입장을 시키고 있었다.
6년 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서 파르테논 신전의 텅 빈 파사드를 올려다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파사드를 채웠던 엄청난 규모의 부조들은 영국 엘긴 경에 의해 떼어져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했다. 연구다 발굴이다 해서 강대국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문화유산들이 제 터에서 강제로 떼어져 옮겨졌던가.
엄청난 규모와 소장품을 자랑하는 영국박물관이지만 우리 부부는 그리스관과 이집트관 두 곳만 집중적으로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