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성에 가기 위해 패딩턴 역에서 기차를 이용했다. 윈저성이 있는 윈저&이튼 센트럴역까지는 기차로 편도 40분 정도. 에든버러를 떠날 때부터 시작된 감기로 고전 중이었지만 컨디션이 괜찮으면 윈저성에서 돌아와 패딩턴 역 인근에 있는 비틀즈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 다녀오기로 했다.
패딩턴 역을 출발한 기차는 슬로우역에서 한 번 갈아타야 했다. 슬로우역과 윈저&이튼 센트럴역을 오가는 기차는 두 칸짜리 작은 기차다 보니 사람들을 빽빽하게 태우고 출발했다. 슬로우역까지 6분이면 도착하니 서서 가도 충분한 거리.
윈저성은 몰라도 윈저는 귀에 익은데 위알못인 내게도 위스키 하면 떠오르는 것이 나폴레옹과윈저였다. 뉴스 미디어의 영향이 컷을 것이다. 지금이야 버번이니 스카치위스키니 조금 구별도 하게 되었고 무더위가 맹위를 떨쳤던 올여름엔 맥주보다 하이볼에 먼저 손이 가긴 했지만 위스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최근의 얘기. 위스키로 먼저 입력되었던 윈저는 사실 영국왕조의 하나로 찰스 3세가 속한 현 왕조이기도 하다.
윈저&이튼 센트럴역은 붉은 벽돌로 아기자기한 인상을 풍겼다. 역사와 이어져 있는 윈저 로열 쇼핑몰은 기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활기를 띠었다. 쇼핑몰을 빠져나오자 바로 윈저성의 성채가 시야를 우뚝 막아섰다. 돌로 쌓아 올린 성채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성의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었다. 현재도 왕실의 거주지로 제 몫을 하고 있어서인지 빈틈없어 보이는 단단한 외관이 흠잡을 데 없어 보였다. 언뜻 런던탑을 연상케 했는데 윈저성의 건축 연원이 윌리엄 1세로 올라가기 때문일 것이다.
근위병 교대식이 11시에 예정되어 있어 교대식을 보고 성에 입장할 계획이었는데 그걸 그새 까맣게 잊고 성에 들어가는 대기줄에 서서 그대로 입장. 지금 생각해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물에 콩 나듯이 코앞에 일정을 스킵하고 바로 다음 일정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가 딱 그랬다.
완만한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윈저성은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어 있었고, 템즈강을 끼고 있어 강이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윈저성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생전에 주말이면 자주 머물렀던 성이기도 하고 세계에서 사람이 가장 오래 살고 있는 성이라는 수사가 붙어 있다.
돌로 지어 올린 성은 돌이 갖고 있는 고유성으로 인해 저마다 다른 매력을 드러내는데 에든버러성이 짙은 노란색이 섞여 있는 다소 낮은 채도를 지녔다면 윈저성은 밝은 노란색이 섞여 상대적으로 높은 채도로 단정하고 산뜻하게 느껴졌다.
천년에 가까운 시간이 녹아 있는 성안을 천천히 걸었다. 시간의 빗장이 풀린 듯 햇살과 바람이 귓가를 간질이고 지나가는 영겁의 시간 속에 있는 듯했다.
성의 스테이트 아파트먼트 안에는 조지 5세의 왕비였던 메리의 ‘인형의 집’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조지 5세가 아내인 퀸 메리에게 선물한 ‘인형의 집’은 실제의 1/12 크기로 지은 저택으로 서재와 식당, 침실 등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고, 인형의 집에 꽂혀 있는 책들 또한 실제로 읽을 수 있도록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가구, 카펫, 커튼 등 모든 실내장식은 당대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어 중요한 역사자료로 평가받고 있었다.
인형의 집(네이버 이미지-윈저성의 모든 실내는 촬영불가)
윈저성의 왕실 예배당인 세인트 조지 채플로 들어섰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채플은 마치 파리의 시테섬에 있는 왕실 예배당인 세인트 샤펠을 떠올리게 했다. 세인트 샤펠이 화려함의 극치라면 세인트 조지 채플은 화려함의 절반을 덜어내는 대신 묵직함을 더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은 오색의 빛조각으로 나뉘어 채플 안으로 고요히 떨어져 내렸다. 몹시 아름다웠다.
세인트 조지 채플
채플을 막 나오려는 찰나, 2년 전 세상을 떠나 이곳에 안장된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공의 무덤을 그냥 지나쳤다는 것을 알았다. 채플 안에는 역대 왕들과 왕실 가족들이 안장되어 있었고 채플에 들어오면 한 방향으로만 걸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다시 되짚어가자니 난감했다. 마침 출구 쪽에 사무실이 있어서 놓친 것을 얘기하고 혹시 다시 볼 수 있는지 물으니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직원 한 분이 기꺼이 우리 부부를 거꾸로 안내해서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볼 수 있게 해 줬다. 땡큐 쏘 머치.
기차역 식당가에서 점심을 먹고 런던행 기차를 탔는데 피로가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목의 통증도 예사롭지 않아 애비로드는 포기하고 일찌감치 숙소로 향했다.
저녁으로 남편이 스테이크를 굽고있었는데 연기가 좀 많이 난다 싶더니 갑자기 화재경보기가 온 건물을 흔들 듯이 울렸다. 스테이크를 굽는 팬에서 올라간 연기가 천장에 있는 화재경보기를 작동시켰던 것. 어찌나 놀랐는지. 다행히 스프링 쿨러는 작동하지 않아 물벼락은 면할 수 있었다. 리셉션도 조용했다. 휴..
비싼 숙박료에 비해 인덕션 위에 후드 없이 환풍기만 있어서 신경이 쓰이더니 결국 이런 이벤트를 만들었다. 놀란 가슴은 스테이크와 런던 프라이드 맥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