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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R Oct 30. 2024

1분이라도 여행자로 살 수 있다면

강변 카페에서, Love and Peace

강변 카페를 찾은 가을날


날씨가 너무 좋아 집에만 있기에 아까웠던 어느 가을날, 강가에 자리 잡은 카페에 갔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큰아이도 함께 갔다. 날이 좋으니 바람 쐬며 공부하라는 마음이었다.


이 카페는 좀 비싸다. 관광객들을 위한 카페라 지역 주민들은 자주 가지 않는다. 주민인 나는 이런 날, 기분 내기 위해 들른다. 앞으로 강이 흐르고 지하철이 지나가는 철교가 보여, 소위 '강뷰'를 위해 이 정도 비용을 치를 가치가 있는 곳이기는 하다. 주인은 날씨가 좋으면 1층 폴딩 도어를 활짝 열어 강바람이 그대로 카페로 흐르도록 둔다. 건물 앞 강변에는 빈백들과 테이블들을 설치해 두었다. 빈백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며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를 들으면서 까무룩 졸기 좋은 곳이다. 주말이면 손님이 가득 차 있어 나는 주로 평일에 이용한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날은 좋고, 평일이니.   


막상 가보니 강바람이 좀 분다. 실내에 있을까 싶어 들여다보니 10여 명 정도의 단체 손님이 있다. 몇 번 관광객들의 시끄러움에 당해본 터라 야외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책을 읽고 독서노트를 쓸 계획이었다. 아이는 빈백에 자리를 잡았다. 빈백에 기대어 수학문제를 풀어보겠단다. 따뜻한 바닐라 라테 한 잔 시켜놓고 책을 읽으니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늘은 파랗고, 간간이 들리는 치익치익 지하철 지나가는 소리도 좋았다. 카페에 비치되어 있는 무릎 담요를 두르고 앉으니 강바람도 견딜만했다.  


그 카페의 전경 / 이 사진은 봄에 찍은 것



어디선가 들리는 노랫소리


한참 독서노트를 쓰고 있는데,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 어디서 나는 소리인가 찾아봤다. 야외 테이블에서 녹색 웃옷을 입은 여성이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었다. 흠칫 놀랐다. 카페에서 춤이라니? 좀 전에 실내에 있던 손님들이 야외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나 보다. 60대로 보이는 남녀 10명 정도가 함께 있었다. 속으로 '카페에서 웬 춤 이래? 저러다 말겠지' 하고 고개를 숙였는데 이제 통기타 소리까지 들린다. 한 남성 분이 기타를 치고 있었다. 미사리 카페에서나 들을 법한 70, 80 노래를 함께 부르고, 녹색 옷을 입은 여성은 계속 춤을 추었다.  


카페에서 통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이었다. 나의 머리는 '남의 사업장에서 방해가 되는 행동'에 대한 기준을 따지고 있었다. 카페 주인에게 얘기를 해야 하는 걸까? 폴딩도어가 열려서 다 보이기는 할 텐데? 주인이 이 상황을 이미 알고 있는데도 그냥 두는 걸까? 혹시 주인의 지인들일까? 다른 손님들은 괜찮나?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시간이 흘러도 주인은 관여하지 않았고 주변 손님들 중 불평을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괜히 나서서 컴플레인을 걸었다가 좋은 가을날이 망쳐질까 봐, 나도 그냥 있었다. 시간이 흐르니 노랫소리는 끊겼다. 누군가와 전화 통화하는 소리가 들린다. "지금 000 모임 중이야. 우리 다다음주에 공연해. 보러 와." 은퇴 후 취미로 노래 부르고 춤추는 모임인가 싶어졌다.  


공부하던 아이를 불렀다. 같이 빵을 먹으면서 아이에게 물었다.  

"아까 춤추고 노래하던 손님들 봤어?"

"응."

"엄마는 주인에게 얘기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했었어. 카페에서 저렇게 노래 부르고 춤춰도 되는 건가?"


아이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한다.

"LOVE AND PEACE."


"뭐라고?"

황당해져서 되묻는 나에게 아이가 한마디 툭 던진다.  


"나는 히피가 생각났어."



할 말이 없어졌다.


할 말이 없어졌다. 남의 사업장에서 민폐를 끼치는 것 아닐까 생각하던 나와 달리, 아이는 히피들의 자유로움을 떠올렸단다. 나의 각박함이 무안해졌다. 마침 내가 정리하고 있던 독서노트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서도 잠깐이라도
여행자로 살 수 있다면.
퇴근길 1분이라도
출근길 1분이라도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잠깐이라도
행복한 내가 될 수 있다면.

- 모든 요일의 기록, 김민철, p139


출퇴근길의 해도, 여행지에서의 해도 다른 해가 아닌데, 그곳과 이곳의 내가 다르다, 그곳에서도 1분이라도 여행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담긴, 여행을 좋아하는 김민철 작가의 글이다.   


카페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다, 김민철 작가의 또 다른 <모든 요일의 기록>에 나오는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작가는 포르투갈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로 했단다.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포르투갈이었는데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니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는다.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 작가는 갈 곳이 없어져버렸다. 가족들과 왁자지껄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사람들 속에서 외로워진 작가는 유일한 가족인 남편과 함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에 동산책을 나선다. 고요한 골목을 걷다가 문득 기타 연주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는데, 예상치 않았던 장면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 문득, 기타 연주 소리가 들렸다. 다시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안전봉에는 맥주 트레이가 용접되어 있었다. 분명 밖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집안 같은 그 골목에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처음에는 기타를 든 아저씨 하나였다. 아저씨가 연주를 시작하자, 주변 친구들은 우르르 어딘가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각자의 악기를 들고 나타났다. 젬베를 들고 온 사람도 있었고, 흔들 때마다 모래 소리가 나는 이름 모를 악기를 들고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중략)
우리는 손짓으로 맥주 두 병을 샀다. 그리고 얼른 연주하는 사람들 앞에 앉았다. 연주하는 사람도 즐거웠고 우리를 향해 맥주병을 치켜들었고 우리도 덩달아 즐거워졌다.
우리가 본격적인 청중이 되자, 지나가는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쓸쓸하지 않았다. 춥지 않았다. 머나먼 이 땅에서 우리도 크리스마스다운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느낌이었다.

- 모든 요일의 여행, 김민철, p126


이후 가게에서 나온 할머니가 노래를 부른다. 작가는 할머니 손에 이끌려 무대 중앙으로 끌려나가기도 하며 이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춘다. 작가는 할머니의 노래를 녹화한 것을 그 여행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단다. 가끔 그때의 영상을 돌려보면서 그때 그순간을 떠올리는 것이다.




내가 여행자였다면


내가 해외에서 온 여행자였다면, 우리 동네 카페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초록 옷 입은 60대 여성도 포르투갈의 할머니처럼 느껴졌을 테다.  카페에서는 이렇게 노래 부르고 춤춰도 되나 보다, 강바람 맞으며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했을 테고, 가까이 다가가 구경하다 노래가 끝나면 박수를 쳤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왜 이 아름다운 장면을 보면서 '남의 영업장에 와서 민폐를 끼치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 밖에 하지 못했을까, <모든 요일의 여행>이라는 책까지 읽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내가 사는 동네는 도시에서는 일부러 찾아오는 곳이다. 차가 막히는 것을 감수하면서 주말이면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사람들은 작은 것에도 감탄하고 기뻐하며 우리 동네의 모든 것들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산지 12년 차인 주민이다. 모든 것이 익숙해져 버려서 그 소중함을 잊어버린 동네 주민. 강바람 맞을 있는 카페가 너무 익숙해진 나는 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 이야기로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고 돌아보니, 춤추고 노래하던 분들을 관찰해 두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내 마음에 짜증이 가득하니 그분들의 표정, 불렀던 노래, 웃음 등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


"퇴근길 1분이라도 출근길 1분이라도 여행자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김민철 작가의 소망을 나도 가져보기로 한다. 멀리 떠나려고 하지 말고, 동네 산책길, 마당의 나무들, 자주 갔던 카페들, 동네 가게들처럼 익숙해서 잊혀버린 것들을 여행자의 눈으로 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주자.

이제 이야기들을 브런치 매거진에 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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