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동산이 Nov 22.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13

부여의 시작 (3/4)

발의 서쪽 땅에 머물던 조선 사람들에게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하-백의 딸과 단-군이 혼인하였던 시기는, 앞서 해부루의 주활동시기라고 하였던 MC-118[+30)의 시작보다 1세대 30해 앞선 MC-148 즈음입니다. 앞서 아사달이 연에게 깨트려지기에 앞서 주변으로 퍼져나 조선 사람들이 머물던 곳에, 동호가 흉노에게 패배한 뒤에 그 무리인 오환, 선비가 몰려들자 조선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다시 움직여 발의 서쪽 땅에 이르렀던 것이니, 그리하고서 이 시기까지 이미 2세대 가까운 시간이 흘렀니다.


조선 사람들이 새로운 땅에 들어와서 자리잡아 머무른 것이 이렇게 오래 되었다면,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에 본래 자리잡고 있던 발 사람들과 다른 무리를 이루 되어 그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다고 해도, 그곳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머물던 곳을 떠나 움직였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어떤 상황의 변화가 그들에게 그리하도록 하였을까요?




그 남쪽에 있던 진-번 사람들에게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진 사람들은, 보다 앞서 위만과 손잡고서 일부는 위만의 뜻에 따라 동쪽으로 가서 작은 읍들 - 예 사람들이 자리잡아 머물던 장소를 다스렸습니다. 그러지 않고 남아있던 진 사람들은 뒤에 위만의 손자 우거가 조선을 다스리던 시기에, 예상되는 조선과 한의 충돌을 피하고자 예를 통해 다시 남쪽으로 가서 진-국을 이루었습니다. 뒤에 역-계-경을 따르는 무리가 조선을 떠나 마-한에 이르고 다시 이곳 가까이 와서 머물렀고 한 무리를 이루어 진-한이라고 습니다.


이 때 역-계-경을 따르는 무리가 이르렀던 시기를 MC-138/10[+12) 즈음이라고 하였는데, 진-국은 이 시기보다 앞서 이루어졌으니 진 사람들이 옮겨온 일은 MC-138/10[+12)보다 앞서 일어났습니다. 국을 이루어내는데에 들었을 시간 적어도 10해 남짓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보고 포함시키면, 진-번의 우두머리들적어도 MC-148보다 앞서 진-번을 떠났던 것입니다.


 단-군이 하-백의 딸과 혼인하여 부루를 낳은 시기 해당합니다. 단-군새로운 조선 사람들을 받아들 것은 앞서 말했듯이 여전히 따르지만 같은 무리가 되지는 않던 발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대비하고자 하였던 것이었는데, 이제 발 사람들의 땅 바깥의 진-번 땅에 사람들은 많이 남아있지만 그들을 다스릴 우두머리가 없진 상황이 되 단-군은 이 새로운 조선 사람들을 그 땅에 보내 자리잡도록 하고자 그 우두머리의 딸과 혼인하여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진-번 땅에는 그들보다 먼저 그 북쪽 변방 사람들[胡]인 구려 사람들이 들어와 자리잡았습니다. 그들은 보 앞서 아사달을 통해 움직이고서 예, 맥과 더불어 진-번의 서북쪽 땅에 머물렀는데, 뒤에 그 땅에 오환, 선비가 들어오게 되면서 일부 예, 맥 사람들다시 진-번의 땅으로 움직였처음 위만과 손잡고서 조선-왕 준을 깨트리는 것을 도왔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이르러 구려 사람들이 또한 이 사람들을 통하여 진-번의 땅으로 들어올 수 있었니다.




그리하여, 단-군을 따르는 조선 사람들이 가기에 앞서 진-번 땅에는 예, 맥, 그리고 구려 사람들이 차례로 들어와 자리잡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던 한漢의 팽오는 조선을 통하지 않고 보다 멀리, 앞서 준을 떠나 한-반도 동쪽으로 가서 자리잡던 예, 맥에 이르러 그 물건들을 가지고 돌아와 이득을 얻어내고자 하였고, 그리하여 요동-군 동쪽에 맞닿은 진-번 땅을 통해 새로 그곳에 이르는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하여 진-번의 땅은 한과 예, 맥, 진-번의 이득이 오고가는 땅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적은 사기 화식열전의 구절을 앞서 살폈습니다.


뒤에 길을 통하여 예가 한漢을 따르기로 하니, 한은 팽오를 대신하여 창해-군을 두어 그 길을 맡도록 였습니다. 한은 그 길을 - 북쪽 땅에 자리한 숙신으로부터 - 지키기 위한 댓가를 연, 제 사람들이 치르도록 하였는데, 그 부담이 지나치게 커서 연, 제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니 한은 오래 지나지 않아 창해-군을 없앴습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가 MC-128/10[+12)에서 MC-125/10[+12) 사이에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한 뒤에 한은, 이 길을 다시 여는 대신, 흉노를 물리치고 남월/동월을 깨트리고서 다시 조선-한 전쟁을 통해 조선을 또한 깨트리고 그 땅에 4개 군들을 두어 예와 오고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두었던 4개 군들의 이름은 각각 낙랑-군, 임둔-군, 현토-군, 진-번-군인데, 이 가운데 현토-군은 예 사람들이 있던 곳을, 진-번-군은  진-번 사람들이 있던 곳을 다스렸습니다.




그러한 군들 가운데 낙랑-군, 임둔-군, 현토-군을 두었던 곳에는 무리들의 우두머리들이 있어 그들을 다스리는 현들을 통해 군 안의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진-번-군에는 본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진 사람들이 떠난 뒤 우두머리가 서지 않아 같은 식으로 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물론 한은 앞서 조선-한 전쟁을 치르며 진-번 땅에 들어와 있던 구려 사람들을 비롯한 여러 무리들을 깨트렸으며 그리하여 고구려-현을 비롯한 현들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리들은 본래 머물던 많은 사람들에게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그들을 다스리도록 두었던 현을 통해 진-번-군의 사람들을 쉽게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진-번의 땅은 다른 군들이 두어진 곳들과 달리 한의 다스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오래도록 니다. 구려 사람들과 본래 머물던 진-번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한漢에서 팔아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이 알려진 예, 맥의 물건들을 가져올 길이 열린 땅이 딱히 우두머리 노릇하는 사람 없이 남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오환과 맞닿아 있어 한에 알려진 부여 사람들이 그 우두머리인 부루와 더불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이렇게 변해버린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단-군이 바라던 바가 무엇인지는 아주 분명했고, 그리하여 부여 사람들을 거느리고 부루가 옮겨 자리잡은 곳이 바로 흘-승골-성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2장 4편 부여夫餘 (1) #1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