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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Nov 21. 2024

2장 4편 부여夫餘 (1) #12

부여의 시작 (2/4)

앞서의 글에서는 단-군의 아들 부루가 그 어머니인 하-백의 딸이 있던 비서 곧 부여에서 자라서 조선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리하여 해부루라고 불리게 되었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첫 단-군 왕검이 그 어머니가 있던 곳에서 자라 단-군 곧 단 사람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과 같니다.


그런데 왕검이 자란 곳은 단 사람들이 머물던 땅이기는 하였지만, 그 이름으로 이르던 태백-산 꼭대기의 땅이 아니라 가까이 있던 평양이라는 땅이었습니다. 그가 거기에서 처음 무리를 모아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 도읍하여 평양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다시 옮겨 아사달에 도읍하니 그 장소는 왕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한참 뒤에 위만이 도읍하며 왕험으로 달리 적혔습니다.


부루가 자란 곳은 조선 사람들이 있던 부弗의 서쪽 땅, 물줄기[河] 가까이 하-백[河-伯]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곳이었는데, 여기에는 참 뒤 고구려 동명-성왕을 만나서는 스스로 선인仙人 - 조선 사람 - 의 후손이라고 일컬었던 송양宋讓의 조상이 우두머리로 서서 스리던 국國 있 이름 비류沸流고 하였으니, 이 이름을 가지고 그곳을 흐르는 물줄기를 비류-수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이 비류라는 이름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앞서 왕검이라는 이름으로, 단에 가까이 있어 왕검이 자 단 사람들을 다스리던 장소를 왕검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여에 - 부여 가까이 있어 부루가 자 부여 사람들을 다스리던 장소 또한 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그 뒤 위만이 도읍하고서 왕검을 달리 왕험이라고 적었듯이 송양의 조상이 여기에 도읍하고서 부루를 달리 비류라고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부루夫婁를 달리 비류沸流라고 적을 수 있었을까요? 자료들을 통해 답을 구해봅시다.




비沸는 부夫로 달리 적은 부弗를 물줄기가 흐르는 곳임을 나타내고자 부수를 보태어 달리 적은 것니다. 또한 부弗는 가운데의 가로 획들과 바깥의 세로 획이 누락되어 비非로도 적었으니, 소리가 같은 비沸를 또한 비非 곧 본래의 비弗을 대신하여 적을 수 있었습니다. 비류沸流 가운데 비沸는 부夫로 달리 적은 부弗를 달리 적은 것이니, 부夫를 달리 적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류沸流 가운데 流는 현재 '류'라는 소리로 이어진 옛 소리를 적은 것인데, 현재 같은 소리를 가지는 글자로 留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시작하여 루婁가 적은 바 현재의 '루'로 이어진 옛 소리로 이어질 수 있는지 확인해보 됩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유리-명왕의 이름을 유리類利라고 적었는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인용한 어떤 기록은 유류孺留라고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곧 留로 적은 옛 소리가 利로 적은 옛 소리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 利의 소리인 '리'로 이어진 옛 소리 가운데 모음이 'ㅠ'에 가까운 옛 소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① (유리-명왕의) 이름[諱]은 ② 유리類利였다. ①諱②類利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인용 어떤 기록: ① 유류孺留라고 하였다. 或云①孺留


그러한 利의 옛 소리에 대해서 흥미로운 자료가 있습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21년 03월 기사는 웅략-천황이 久麻-那利라는 이름을 가진 곳을 문주-왕에게 내려주었다고 적었는데, 이곳은 곧 웅-진[熊-津]이니 久麻는 곰을 적은 것이며 那利는 '나루'라는 소리를 적은 것입니다. 곧 利의 소리 가운데 현재의 ''라는 소리로 이어진 옛 소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이 앞서 이야기한 바 모음이 ''에 가까 옛 소리였습니다.


일본서기: (웅략천황 21년 봄 03월) ① 쿠마-나루[久麻-那利](=웅-진[熊-津])가 ② 문주-왕[汶洲-王]에게 내려지도록 하였다. (雄略天皇二十一年春三月)①以久麻那利②賜汶洲王


그렇기에 현재 婁의 소리인 '루'로 이어진 옛 소리를 달리 利로 적었으며, 이 옛 소리는 또한 留로 적을 수 있었으니 그 옛 소리가 이어진 현재 留의 소리 '류'를 또한 가지는 流로 적을 수 있었니다. 따라서 비류沸流 가운데 流로, 루婁로 적은 옛 소리를 달리 적을 수 있었습니다.




리하여 앞서 살핀 바를 더하여보면, 부루夫婁를 달리 비류沸流라고 적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달리 적은 것은 부루라고 일컬었던 단-군 또는 발의 서쪽 땅에 들어왔던 조선 사람들이 떠난 뒤에 그리하였던 것이니 곧 남아있던 발 사람들에 의해 쓰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발 사람들은 또한 수 사람들과 더불어 머물렀으니 그곳을 달리 졸본卒本이라고 하였음을 앞서 말한 바 있습니다. 뒤에 그곳에서 떠난 사람들이 백제를 세웠는데 이 때 온조의 형제를 이름하여 비류沸流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온조 때에 그 사람들이 돌아가 고구려를 따른 뒤에 그 아들을 다루多婁라고 하여 류流 대신 루婁를 썼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발 사람들은 조선 사람들이 루婁로 적은 옛 소리를 流로 적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앞서 백제를 떠나 고구려로 간 사람들은 곧 고구려를 졸본에서 함께 나왔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는 백제 사람들 가운데 마-한 사람들이 많아졌고, 때문에 곧 그들이 쓰던 옛 조선 사람들의 방식을 따라 루婁를 썼던 것입니다.


발 사람들이 머물던 졸본에는 뒤에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죽은 뒤, 대소의 아우를 따르던 사람들이 고구려에 항복하여 머물렀는데, 이 사람들이 뒤에 다시 부여를 일으켰습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한참 뒤에 백제와 함께 하여 마침내 그 왕의 자리를 있고는 그들과 함께 하기로 하였던 왕을 비류-왕[沸流-王]이라고 적었으니, 곧 발 사람들의 방식을 따른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뒤에 백제에 대해 다루며 자세히 살필 것이니 여기에서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정리하면, 조선 사람들이 발의 서쪽 땅에 들어와 무리를 이루기 시작하여 하-백이라는 우두머리가 나타나자 단-군은 그 딸과 혼인하고는 아이를 얻어 그들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였으니, 이 아이가 곧 부루입니다. 왕검이 그러하였듯 부루는 그 땅에서 가운데에서 그들을 다스리며 무리를 일러 부서라고 하였는데, 뒤에 옮겨가서 홀-승골-성에 도읍하여 다스리니 곧 부여-왕 해부루입니다.


그가 다스리다가 떠난 곳을 사람들은, 왕검에 대해 그리하였듯이, 그의 이름을 싸서 그곳의 이름을 부루라고 하였습니다. 뒤에 발 사람들이 많아지고 단-군이 사라진 뒤에 새로 일어나 그곳에 국을 세워 다스린 우두머리는 발 사람들의 방식을 따라 부루 대신 비류라고 적었고, 그곳의 물줄기를 또한 그리 이름하면서 땅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이러한 본래의 발 서쪽 땅에서 흘-승골-성으로 옮겨가는 큰 흐름 위에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상황의 변화를 다른 자료들을 통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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