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2편 진辰 (2) #5
진-한의 여섯 무리들 (5/8)
삼국유사 기이편은 본피-부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최-씨 성의 사람들이 진지-촌의 우두머리 지백호를 조상으로 여겼다[B-19:⑦-⑧]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적은 구절에 이어, 최치원 - 잘 알려진 신라 말의 유학자 - 을 본피-부 사람이라고 적고 이어 그 근거로 황룡-사 남쪽 미탄-사의 옛 터를 최-후의 옛 집이라고 하였다[B-19:⑭-㉑]고 적었습니다. 앞서 자료를 다시 옮겨 놓습니다.
B-19 삼국유사 기이편: ① (6개 촌들의) 넷째를 ● 말하기를 ②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이라고 하였다. ③ (진지-촌의) 우두머리를 ● 말하기를 ④ 지백호智伯虎라고 하였는데, ● (지백호는) ⑤ 처음 ⑥ 화-산[花-山]에 내려왔다. ● (뒤에) ⑦ 이 사람을(= 지백호를) ⑧ 본피-부[本彼-部] 최-씨[崔-氏]의(= 최-씨가) 조상이라고 하였다. ⑨ 지금 ⑩ (화-산 아래를) ● 말하기를 ⑪ 통선-부[通仙-部]라고 하며, ⑫ 시파柴巴 등 동남쪽 촌들이 ⑬ (통선-부를) 따른다. ⑭ (최)치원致遠이 ● 이어 ⑮ 본피-부 사람이었는데, ⑯ 지금 ⑰ 황룡-사 남쪽 미탄-사에 ⑱ 옛 터가 있고 ⑲ (이 터를) 일러 ● (말하기를) "⑳ 이곳[是]이 ㉑ 최-후의 옛 집이었다."라고 하니, ● 거의 ㉒ 분명하다. ①四●曰②觜山珍支村③長●曰④智伯虎●⑤初⑥降于花山●⑦是⑧爲本彼部崔氏祖⑨今⑩曰⑪通仙部⑫柴巴等東南村⑬屬焉⑭致逺●乃⑮本彼部人也⑯今⑰皇龍寺南味呑寺南⑱有古墟⑲云●⑳是㉑崔侯古宅也●殆㉒明矣
그런데,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은 최치원을 왕경 사량-부 사람이었다[E:①]고 적었습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것은 사량-부의 정-상-택이 한 때 최-씨의 집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앞서의 구절 또한 본피-부의 집인 지-상-택과 항질-택 가운데 하나가 한 때 최-씨의 집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구절들 만으로는 최-씨가 사량-부였는지 본피-부였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E 삼국사기 최치원열전: (최치원은) ① 왕王의 수도[京]의(= 수도에 있던) 사량-부[沙梁-部] 사람이었다. ①王京沙梁部人也
하지만, 최치원을 그 시작점으로 삼아 나아가면 중요한 단서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어릴 때 당에 가서 공부하고 뒤에 신라에 돌아와 벼슬하였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08년 02월 기사는 최치원이 벼슬하여 아손이 되었다[C-10:②]고 적었습니다. 여기의 아손이 바로 단서입니다.
C-10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성왕 08년 봄 02월) ● (왕이) ① (최)치원에게 벼슬을 주니 ● (최치원이) ② 아손이 되었다. (眞聖王八年春二月)●①拜致遠●②爲阿飡
여기서 관의 급을 이르는 글자의 소리를 세간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적고 있는데, 그 이유는 여기서 짧게 이야기하기에는 많이 복잡합니다. 때문에 일단 이 이름이 정하여지던 일을 적은 유리이사금 09년 기사를 이야기하는 시점에 모두 다루기로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삼국사기 직관지는 신라의 17개 관의 급 가운데 6번째를 아손이라고 하였다[F-1:⑨-⑩]고 적었는데, 이 구절보다 앞서는, 5번째를 말하기를 대아손이라고 하였다[F-1:①-②]고 적었습니다. 그리고서 바로 뒤이어 대아손부터 이벌손까지는 오직 진골인 가문들이 맡고 다른 가문들은 그러지 않았다[F-1:③-⑧]고 적었습니다.
F-1 삼국사기 직관지: ① 5번째를 ● 말하기를 ② 대아손이라고 하였다. ③ 이것[此](= 대아손)에서 ④ 이벌손까지는, ● 다만 ⑤ 진골이 ⑥ 그것들을 받고 ⑦ 다른 가문들은 ● 곧 ⑧ 그리하지 않았다. ⑨ 6번째를 ● 말하기를 ⑩ 아손이라고 하였다. ①五●曰②大阿飡③從此④至伊伐飡●唯⑤眞骨⑥受之⑦他宗●則⑧否⑨六●曰⑩阿飡
그렇다면 부의 우두머리들은 어디에 해당할까요?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 08월 기사는 왕 곧 파사-이사금이 수로-왕에게 잔치를 베풀어주도록 하였는데 6개 가운데 5개 부들의 우두머리들이 이손이 그 일에 우두머리 노릇을 하도록 - 맡도록 하였다고 적었습니다.
C-11 삼국사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23년 가을 08월) ① 이 때에 ② 왕이 ③ 6(개) 부들[部](= 부들의 우두머리들)에게 명령하니 ● (6개 부들의 우두머리들이) ④ 모여 수로-왕[首露-王]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는데, ⑤ 5(개) 부들(= 5개 부들의 우두머리들)은 ⑥ 모두 ⑦ 이손伊飡이 (잔치를 베풀어주는 일에) ⑧ 우두머리 노릇을 하도록[主] 하였고 ● 다만 ⑨ 한기-부[漢祇-部](= 한기-부의 우두머리)는 ⑩ 자리가 낮은 사람이 ⑪ 그 일에 우두머리 노릇을 하도록[主之] 하였다. (婆娑尼師今二十三年秋八月)①於是②王命六部●④會饗首露王⑤五部⑥皆⑦以伊飡⑧爲主●唯⑨漢祗部⑩以位卑者⑪主之
그런데 삼국사기 직관지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이척손을 이손이라고 하였다[G-1:①]고 적었는데, 삼국사기 직관지는 관의 급 가운데 2번째를 이척손이라고 하였다[F-2:③-④]고 적었습니다. 그러니 6개 부들의 우두머리들은 이손에게 그러한 일을 시킬 수 있는, 대아손부터 그 위에 해당하는 진골에 해당합니다.
F-2 삼국사기 직관지: ① 1번째를 ● 말하기를 ② 이벌손이라고 하였다. ③ 2번째를 ● 말하기를 ④ 이척손이라고 하였다. ①一●曰②伊伐飡③二●曰④伊尺飡
G-1 삼국사기 직관지 주석 인용 어떤 기록: <● (이척손을 말하기를) ① 이손이라고 하였다.> (伊尺飡)<或云●①伊飡>
나아가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주다가 이손의 위에 있다[C-12:②]고 적고 또한 뒤에 주다를 각-간이라고 하였다[C-12:③-⑥]고 적었는데, 또한 삼국사기 직관지 주석이 인용한 어떤 기록은 이벌손을 각-간이라고 하였다[G-2:①]고 적고, 삼국사기 직관지는 관의 급 가운데 첫번째를 이벌손이라고 하였다[F-2:①-②]고 적었습니다. 그러니 부의 우두머리들은 진골 가운데에서도 제일 위, 이벌손에 해당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C-12 삼국사기 신라본기: (왕이 말하기를 ")● 마땅히 (네가) ① 주다酒多에 자리하여야 하니, ● (주다는) ② 이손伊飡의 위[上]에 있는 자리다(= 자리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③ 주다酒多는 ④ 뒤에 ⑤ 일러 ● (말하기를) ⑥ 각-간[角-干]이라고 하였다. (曰)●宜①位酒多●②在伊飡之上...③酒多④後⑤云●⑥角干
G-2 삼국사기 직관지 주석 인용 어떤 기록: <● (이벌손을 말하기를) ① 각-간이라고 하였다. <或云●①角干>
이것은 사실 앞서 이 사람들이 따르던 곳의 옛 이름이 진-국[辰-國]이며 이곳을 이루어낸 진辰 사람들이 본래 이르렀던 진-번[眞-蕃] 가운데 진眞에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 한자 眞骨이 이미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에 이르러 그 본래의 무리가 커지며 소리를 적던 옛 글자를 내세워 적은 것 뿐입니다.
요컨대, 본래 6개 부들의 우두머리들은 진골에 해당하였는데 그 가운데 최치원의 가문[宗] 곧 최-씨 성을 쓰는 사람들은 어느 시기에 이르러 6두품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로 그리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 일을 알 수 있다면 다시, 최-씨 성의 사람이 처음에 그리고 뒤에 다시 우두머리 노릇을 했던 부가 각각 사량-부와 본피-부 가운데 어느 것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일이란 무엇일까요? 알 수 있는 사실은 6개 부들 가운데 적어도 2개 부들과 관련된 일이며, 왕이 주는 관의 급과 관련되어 있으니 왕이 맡은 신라라는 방邦 전체와 관련된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이제 여러 자료들에서 찾아보면, 삼국사기 석우로열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석우로열전은 사량-벌의 국들이 옛날 우리 - 신라 - 를 따랐으나[H-1:①-③] 등돌리고 백제를 따르니[H-1:④-⑤] 석우로가 군사들을 거느렸고 그리하여 군사들이 그것들 - 그 국들 - 을 없앴다[H-1:⑥-⑧]고 적었습니다. 이 일은 고구려-위 전쟁의 뒤에 일어난 한韓과 위魏가 서로를 마주하였던 일에서 이어지는 것입니다.
H-1 삼국사기 석우로열전: ① 사량-벌[沙梁-伐]의 국들[國]은 ② 옛날 ③ 우리를 따랐는데 ● 문득 ④ (우리에게) 등돌리고 ⑤ 백제百濟를 따랐다[屬]. ⑥ (석)우로于老이 ⑦ 군사들을 거느리니 ● (군사들이) ⑧ 가서 쳐서 그것들[之]을 없앴다[滅]. ①沙梁伐國②舊③屬我●忽④背⑤而歸百濟⑥于老⑦將兵●⑧往討滅之
그 자세한 일은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라 왕 가문[宗]의 사람인 석우로가 사량이라는 장소에 있어 등돌린, 성[伐]이 있던 국들을 없앴다[滅]는 구절입니다. 멸滅이라는 글자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이미 다루었다시피, 그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다른 우두머리의 뜻에 따르도록 한 것을 말하니, 이 때에 마-한 사람에게 맡겨 대를 이어 다스리도록 하였던 그 자리를 왕이 거두어 결정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그 뒤로도 왕의 가문이 거느린 세력이 커짐에 따라 그러한 자리들은 점점 왕의 가문에 돌아가게 되니, 현재의 울진 봉평에서 발견된 비碑가 만들어지던 시기가 되면, 비에 새겨진 글이 喙部牟卽智寐錦王과 沙喙部徙夫智葛文王라고 적고 있는 바, 사량-부 뿐만 아니라 양-부도 왕 가문에 해당하는 사람이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앞서 자료가 적은 사량이라는 장소에 있던 국들을 왕 가문이 다스리게 되었던 일입니다.
그리하여 사량이라는 이름의 장소를 본래 다스리던 사량-부의 우두머리는 더이상 우두머리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진골에서 물러나 6두품이 되었으니, 이것이 최치원을 포함한 최-씨 성의 사람들이 겪었던 일입니다. 곧 최-씨 성의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우두머리 노릇을 하였던 부는 본피-부가 아니라 사량-부였으며, 본피-부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한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입니다.
최-씨 성의 사람들이 사량-부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된 일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09년 기사가 적고 있으니, 이 시기보다 앞서 본피-부 곧 진지-촌을 고쳐 새로 이르던 우진-부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된 시기는 유리이사금 02년입니다. 정-씨 성의 사람들이 사량-부, 앞서 고허-촌을 고쳐 이르던 고허-부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시기는 유리이사금 02년, 본피-부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게 된 시기는 유리이사금 09년입니다.
지절 01년: 고-허-촌 (소벌도리)
유리이사금 02년: 고-허-부 (정-씨)
유리이사금 09년: 사량-부 (최-씨)
지절 01년: 진지-촌/우진-촌 (지백호)
유리이사금 02년: 우진-부 (최-씨)
유리이사금 09년: 본피-부 (정-씨)
그리하여 이제 하나의 질문에는 답을 얻었고, 다음 글에서 나머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이어 풀어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