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잡동산이 Jul 21. 2024

1장 1편 조선朝鮮 이전 #12

남아있게 된 기록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 왕검과 평양이라는 이름이 나란히 나오는 부분은 동천왕 21년 02월 기사[E-6]입니다.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이 단어들은 옛 기록에만 나오, 이 이야기를 본래 전한 것은 환 곧 환-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계속 환-도에 있었는데, 이 기사 시점 즈음까지 전혀 나오지 않 이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나는 것은  즈음에서야 처음으로 환-도에 어난 변화 때문입니다.


 변화는 무엇일까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 02월 사에서 시작하여 시간을 거슬러가며 가까운 시기의 들 가운데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한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바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동천왕 21년 02월 기사에서 환-도-성[丸-都-城]이 어지러움[亂]을 지냈다[經][E-6:②]고 적은 구절의 어지러움, 곧 위의 무구검이 고구려의 도읍인 환-도 깨트렸던 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떻게 이 일이 환-도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깥으로 흘러나오도록 하였을까요? 이 질문의 답은, 같은 일의 다른 결과를 담은 자료들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겨울 10월 기사와 삼국지 위서 무구검전은 모두 고구려가 위에 깨트려지기 앞서 득래가 왕을 말렸지만 왕이 듣지 않으니 득래가 한탄하고서 먹지 않아 결국 죽었다[E-7-(1):①-⑩ = P-(1):③-⑬]고 적었습니다. 리고서 이어 무구검의 명령으로 위의 군대가 득래의 무덤과 그 주변의 나무을 건드리지 않고 득래의 아내, 아이를 잡아다가 풀어주었다[E-7-(2) = P-(2)]고 적었습니다.


E-7-(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겨울 10월) ● (득래得來가) ① 여러 차례 ② 왕을 말렸지만[諫] ● (왕이) ③ 따르지 않았다. ④ 득래가 ⑤ 한숨쉬며[嘆] ● 말하기를 "⑥ 서서 ⑦ 이 땅을 보니, ● (이 땅은) ⑧ 장차 ⑨ 쑥을 낳겠구나."라고 하였고 ● 이윽고 ⑩ 먹지 않다가 죽었다. (東川王二十年冬十月)●①數②諫王●③不從④得來⑤嘆●曰⑥立⑦見此地●⑧將⑨生蓬蒿●遂⑩不食而死
E-7-(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겨울 10월) ① 무구검毋丘儉이 ② 여러 군대들에게 명령하니 ● (군대들이) ③ 그(=득래의) 무덤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④ 그(=무덤의) 나무를 베지 않았고 ⑤ 그(=득래의) 아내, 아이를 얻었으나 ⑥ 모두 놓아주고 그들[之]을(=득래의 아내, 아이를) 보냈다. (東川王二十年冬十月)①毋丘儉②令諸軍●③不壞其墓④不伐其樹⑤得其妻子⑥皆放遣之
P-(1) 삼국지 위서 무구검전: ① (고)구려句驪의 패자沛者는 ● 이름하기를 ② 득래得來라고 하였는데, ● (득래가) ③ 여러 차례 ④ 궁宮을 말렸다[諫]. ⑤ 궁이 ⑥ 그(=득래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⑦ 득래가 ⑧ 한숨쉬며[歎] ● 말하기를 "⑨ 서서 ⑩ 이 땅을 보니, ● (이 땅은) ⑪ 장차 ⑫ 쑥을 낳겠구나."라고 하였고 ● 이윽고 ⑬ 먹지 않다가 죽었다. ⑭ 국國의 모두가 ⑮ 그[之](=득래)를 슬기롭다고 하였다. ①句驪沛者●名②得來●③數④諫宮⑤宮⑥不從其言⑦得來⑧歎●曰⑨立⑩見此地●⑪將⑫生蓬蒿●遂⑬不食而死⑭擧國⑮賢之
P-(2) 삼국지 위서 무구검전: ① (무구)검儉이 ② 여러 군대들에게 명령하니 ● (군대들이) ③ 그(=득래의) 무덤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④ 그(=무덤의) 나무를 베지 않았고 ⑤ 그(=득래의) 아내, 아이를 얻었으나 ⑥ 모두 놓아주고 그들[之]을(=득래의 아내, 아이를) 보냈다. ①儉②令諸軍●③不壞其墓④不伐其樹⑤得其妻子⑥皆放遣之




자료를 살피기에 앞서 이야기해둘 것이 있습니다. 세간에서는 이 자료 가운데 삼국사기의 구절은 삼국지 위서 무구검전의 구절들을 삼국사기가 옮겨적은 것일 뿐이지 고구려에 본래 이런 자료가 있던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문체 - 문장과 글자가 거의 같다는 점이 제일 큰 근거입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중국 사서와 비슷한 문체로 같은 일을 적고 있는 이유는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에 나타나 있습니다. 본래 전해오던 기록의 문제점, "그(=신라-씨, 고구려-씨, 백제-씨의) 옛 기록들[古記]은 문장들[文]이 어수선하고[蕪] 글자들[字](=글자들의 쓰임)이 서툴었다[拙]."는 점을 해결하고자 같은 일을 적은 중국 사서 문체를 옮겨 다듬은 결과일 뿐입니다.


더구나, 문제점의 인식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옛 기록[古記] - 본래 전해오던 기록을 통해 시작된 것니다. 그러니 그것을 담은 문체 그지고 본래의 기록이 없었다고 여기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하겠습니다.




돌아가서, 앞서의 자료들 가운데 앞 부분, 득래의 이야기는 무구검이 고구려를 깨트리기 앞서 있었지만 고구려 바깥의 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무구검이 득래의 무덤과 가족에게 달리 대해주도록 하였다고 뒷 부분이 적고 있는 것은, 앞 부분어떤 식으로든 흘러나와 무구검에게 전해졌음을 알려줍니다. 또한 이 이야기 전체를 국지 위서 무구검전이 적고 있는 것은 고구려, 특히 환-도에서 흘러나온 이야기가 위魏에 전해졌음을 보여주지요.


어째서 이야기의 앞 부분이 무구검에게 전해지게 되었을까요? 이야기의 뒷 부분을 위해, 다시 말해 환-도의 파괴에서 득래의 무덤과 그 가까이의 나무라는 단어로 상징되는 득가문의 재산, 그리고 득래의 아내와 아이로 적힌 가문의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위 군대의 윗 사람인 무구검을 통해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그것들에 대한 존중 가치있는 일임을 알려야 했고, 러기 위해 무구검이 동의할 만한 가치 - 위와 고구려의 다툼을 막으려 선대가 애썼다는 점을 담은 이야기를 전 것입니다.




득래의 이야기는 고구려 안에서는 이미 알려져 있었던 것이겠지만, 앞서 보듯이 이 이야기는 다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0년 겨울 10월 기사에도 다시 실렸지요. 득래의 가문 사람들이 무구검에게 이야기를 전하였듯, 환-도를 살피기 위하여 돌아온 동천-왕에게도 이야기를 전한 것이지요.


앞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21년 02월 기사는 왕이 환-도에 도읍을 되돌릴 - 다시 도읍할 수 없다고 여겼다[E-6:③]고 적었으며, 그리하여 평양-성을 쌓고서 환-도의 사람들, 사당들을 평양으로 옮겼다[E-6:④-⑤]고 적었습니다. 환-도의 사람들은 모두 새로 쌓은 성으로 옮겨가 보호받기를 바랐을 것이니, 먼저 가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그러할 가치가 있다는 점을 동천-왕에게 알릴 수 있는 것이 필요했겠죠.


앞서의 일로 말미암아 득래 가문의 사람들은 이미 그런 목적에 쓸모있음이 확인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지요. 바로 무구검에게 전했던 득래의 이야기 말입니다. 이 이야기가 동천-왕에게 또한 하여졌고 - 그 가운데에 사람들이 득래를 슬기롭다고 여겼다는 구절이 빠져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왕은 슬기롭지 않았다는 비판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 그것을 고구려의 옛 기록이 적었다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가 문체를 다듬어 다시 적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보고 이야기를 전 환-도의 사람들 가운데에에는 앞서 평양과 왕검의 이야기를 전하던 사람들 또한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자신들을 평양-성으로 옮길 가치가 있음을 동천-왕에게 알려주는 이야기가 필요했겠죠. 때문에 왕검과 평양의 이야기를 전하였고, 그리하여 이야기가 환-도 곧 옛 환의 사람들 사이에서 흘러나와 고구려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이 이야기를 얻 정리한 , 옛 기록을 삼국유사가 인용하여 적을 수 있었던 입니다.


그런데 같은 이유로 이 이야기는 무구검이 위에 머무를 때 무구검에게도 알려졌고 나아가 위魏에도 알려졌습니다.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배송지의 주석이 인용한 위략이 전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보여주듯 위魏의 일이 아닌 이야기들을 삼국지 위서 본문에 적지 않았기에 왕검의 이야기도 그리하였지만, 누군가 이 이야기를 얻어서 정리하고 또다른 위서魏書에 적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 이 위서를 또한 인용하여 단-군의 이야기를 적을 수 있었던 것고요.




그럼 이제 남은 주제는 제왕운기가 인용한 본기, 그것을 전하던 단의 사람들에게서 그 이야기가 흘러나온 자취일 것입니다. 이것은 1장 1편에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앞서 살폈듯, 단의 사람들이 움직인 것은 말갈이 태백-산에서 이미 변형된 이야기를 얻은 시점보다 앞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 사람들의 움직임은 가까이 있던 평양에 일어난 변화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주제는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거든요. 그 때를 기약하며 일단은 여기서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끝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1장 1편 조선朝鮮 이전 #1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