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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동산이 Jul 27. 2024

1장 2편 조선 (1) #6

옛 기록[古記]의 '1,500년'과 '1,908세'

이제 하의 해 세는 법을 통하여 옛 기록의 시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하여 옛 기록의 일들이 어떤 시점에 일어났던 일인지 나하나 알아낼 것입니다.




삼국유사가 인용한 옛 기록은 처음부터 일의 시점을 요의 일을 기준으로 이야기하였으니  요를 이어 요의 일을 적은 순 때의 해 세는 법을 따른 것입니다. 앞서의 작은 글 하나서 보였듯  때의 해 세는 법은 하의 해 세는 법과 같으니 옛 기록의 해 세는 법 하의 해 세는 법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의 해 세는 법이 1년을 0.5해로 세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방법을 가지고 옛 기록의 구절들을 바라보면, 제일 먼저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하고서 다스린 기간이 눈에 들어옵니다. 옛 기록은 이 기간을 1,500년[A:⑨]이라고 적었으니, 곧 750해(= 1,500년 × 0.5해/년)입니다.


앞서 위서를 살펴고서,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하였던 시점 위가 다스리기 시작한 MC+220보다 2,000해 앞선 MC-1780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가 한을 이어 다스리기 시작한 정확한 시점은 MC+220/12지만 위서는 MC+220/01부터 그 연호를 , 'MC+220전'에 다스림을 시작하였다고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 다시 2,000해 앞선 MC-1780는 곧 'MC-1780전'다.


이제 이 시점에 단-군이 아사달에서 다스리던 기간인 750해를 더하면 단-군이 아사달을 떠나 장당-경에서 다스림을 시작한 시점 나니, 바로 MC-1030전(= -1780전 + 750)입니다. 러니, 단-군이 아사달에서 다스리던 마지막 시기, 간지가 기묘인  MC-1030전보다 1년(= 0.5해) 앞선 MC-1031후 됩니.


다시 옛 기록은 장당-경에 이르렀던 단-군이 - 단-군이라는 호 쓰는 우두머리가 - 던 때[壽] 곧 단-군이 다스리던 기간이 1,908세[A:⑲]라고 하였습니다. 1,908세는 1,908년이니 954해(= 1,908 × 0.5해/년)입니다. 라서 MC-76전(= -1030전 + 954) 단-군 자취가 세상에서 사라지기에 앞서 아사달에 돌아 시점은 1년(= 0.5해) 앞선 MC-77후입니디.


다시 옛 기록은 MC-1780전에 아사달 앞서 평양-성에 도읍한 시점을 요 15년, 간지가 경인인 점이라고 하였습니다. 간지가 기묘인 기에 단-군이 아사달에서 물러났다고 하였는데, 시기 MC-1031후니다. 60년(= 30해) MC-1780전보다 간지가 기묘인 기는 MC-1781후니다. 다음 MC-1780전 간지 경진이고, 10년(= 5해) 지난 MC-1775전 간지 경니다. 평양-성에 도읍한 것은 아사달에 도읍한 것보다 앞서의 일이니, 다시 한번 60년(= 30해) 거슬러 올라간 MC-1775전이 바로 평양-성에 도읍하였던 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첫번째 단-군,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진 왕검은 MC-1805전에 평양-에 도읍하였는데, MC-1780전에 마침내 평양-성떠나 아사달에 도읍하였습니다. 이어 아사달에서 다스리던 단-군들은 MC-1031후에 다시 아사달을 떠 MC-1030전부터 장당-경에서 다스니다. 그리고 MC-77후 마지막 단-군이 장당-경을 떠나 아사달로 돌아가고서 세상에서 그 자취가 사라졌습니다.




이 글에서는 앞서 살펴본 위서의 '2000해'에 이어, 도무지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알 수 없 충돌하는 것처럼만 보이던 옛 기록의 '1,500년'과 '1,908세'라는 두 구절을 다루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앞서 하의 해 세는 법 곧 조선의 해 세는 법을 찾아내었으며, 그것으로 두 구절 내용을 함께 이해 해당하는 일의 시기 모두를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옛 기록과 위서의,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던 모든 구절들이 충돌하지 않는 것임이 보여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다음 글에서 다루게 된, 다른 핵심 문자 자료의 한 구절 뿐입니다.




그리로 가기에 앞서 단-군이 있었던 때[壽]를 시작하였던 첫 단-군, 왕검의 일을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세간에서는 그를 신화 - 신령스러운 이야기 안의 꾸며낸 주인공으로 보기도 하고, 동물 숭배 사상이 생겨나던 시기에 있었던 무속 신앙 안에서의 우두머리로 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세속적인 정치 권력을 함께 가졌던 군주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료를 통해서 펴본 시간과 공간 안의 모습은 러한 것들과는 지 않습니다.


우선 1편에 살폈던 바, 본기의 내용은 단의 사람들이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기는 왕검의 이름 단-군이었다고 적었으니, 단의 사람들 왕검을 우두머리로 여기고 그 호를 기억했지만 그를 가까이하지는 않아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호를 이름으로 잘못 알았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단의 사람들그를 바깥에서 온 웅의 아들일 뿐 그들과 가까운, 같은 무리 아니라고 여겨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환의 사람들이 전하였던 바를 적은 옛 기록은 왕검의 이름과 를 제대로 적었습니다. 것을 보면, 환의 사람들 단의 사람들과 달리 왕검을 가까이하기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환의 사람들은 왕검의 이름과 호에, 웅과 인의 이름과 호에 쓰여진 환桓과 천天 쓰는 대신 왕검이 태어났던 곳, 단[檀/壇]만 썼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환의 사람들왕검을 가까이 하기는 해도 같은 무리로 여겨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왕검은 처음 환도, 단도 아닌 평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평양-성에 머물렀으니, 아마도 환의 사람들과 단의 사람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환, 단, 평양의 사람들 가운데에는 왕검을 우두머리로 받들고자 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옛 기록은, 이 무리 또는 그들이 머물던 땅 이름을, 왕검이 일컬어 조선이라고 하였다[A:⑤]고 적었습니다.


그리하여 왕검MC-1805전에  평양-성에서 조선의 우두머리가 었습니다만, 25해 지내고 MC-1780전 되자 왕검은 결국 평양-성 또한 나 멀리 옮겨가서 아사달 도읍하니다. 결국 평양-성에 머물 때부터 환의 사람들, 단의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왕검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단-군이라는 호를 썼니다.


그 뒤 MC-1031후에 이르러 단-군은 아사달에서 물러나서는 장당-경으로 옮겨갔습니다. 이 일을 본기는 적지 않고 옛 기록만이 적 있는 것, 그리고 본기는 장당-경이라는 이름조차 적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이라고 하는 무리 가운데 평양-성에서부터 단-군을 따라 환을 떠났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단-군을 따라 장당-경으로 옮겼지만,  떠났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그러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시간이 흘러, MC-77후에 마지막 단-군이 장당-경을 떠나 아사달로 돌아가 그의 적이 마막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조선 무리 - 앞서 환을 떠났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조선 사람들로만 알려졌는데, 뒤에 이 사람들이 환으로 돌아가면서 평양-성, 아사달, 장당-경에서의 일들 그리고 장당-경을 떠나 아사달로 가서 사라진 일이 모두 전해져 옛 기록으로 남게 된 것이지요.




단-군이 떠난 뒤 장당-경 조선 무리는  새로운 우두머리를 구하여 따랐니다. 흥미롭게도,  상황에서 이어지는 문자 자료가 있습니다. 바로 옛[舊] 삼국사三國史를 인용하였다고 여겨지는 동명왕편의 주석이 그것입니다.


동명왕편 주석은 고구려-왕 동명에게 비류-왕 송양이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이 선인의 후손이라고 하였다[J-1:④-⑤]고 적었습니다. 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동명성왕 01년 02월 기사에 이 일을 적었으니, 일의 시점은 MC-36/02입니다. 또한 동명왕편 주석은 동명이 궁, 실의 기둥들을 1,000세 곧 이미 1,000해가 된 듯 꾸며 보이자 송양이 도읍을 세운 일의 오래됨을 감히 다투지 않았다[J-2:④-⑪]고 적었습니다.


J-1 동명왕편 주석: <(왕이 말하기를 ")● (내가) ① 감히 너[君] (비류-)왕에게 물으니, ● (너는) ② 누구를 잇는 후손인가?"라고 하였다. ③ (송)양이 ● 말하기를 "④ 나[予]는 ⑤ 선인仙人의 후손이다.("라고 하였다.)> <(王曰)●①敢問君王●②繼誰之後③讓●曰④予⑤是仙人之後>
J-2 동명왕편 주석: <① 송양이 ● 바라기를, ② 도읍을 세운 일이 앞선 것, 뒤처진 것으로 ● (고구려-국이) ③ (비류-국을) 따르는 무리[附庸]가 되었으면, 하였다. ④ 왕이 ⑤ 궁宮, 실室을 지으면서 ⑥ 썩은 나무들을 가지고 ⑦ (나무들이) 기둥들이 되도록 하였으며, ● 그리하여 ⑧ (기둥들의) 오래됨이 1,000세歲와 같았다. ⑨ 송양이 ⑩ 와서 (기둥들의 오래됨을) 보았으며, ⑪ 마침내 도읍을 세운 일이 앞선 것, 뒤처진 것을 감히 다투지 않았다.> <①松讓●欲②以立都先後●③爲附庸④王⑤造宮室⑥以朽木⑦爲柱●故⑧如千歲⑨松讓⑩來見⑪竟不敢爭立都先後>


송양은 동명과 오래됨을 다투다가 1,000해가 넘은 기둥을 보고는 다투지 않기로 하였으니, 송양이 뒤를 이었다고 하는 선 사람들에 이어 송양이 머무르던 곳 1,000해에 가깝지만 1,000해를 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단-군이 앞서 MC-1030전부터 다스리기 시작한 장당-경은 송양이 다투던 MC-36/02 곧 MC-36전에는 994해(= -36 - (-1030))가 되니, 앞서 말한 송양이 머무르던 곳의 시간과 잘 일치합니다. 곧 송양이 머무르던 곳이 바로 장당-경이 그가 이은 무리를 이르는 선仙은 조선朝鮮이 분명합니다.


동명왕편 주석은, 어째서 조선 사람들[朝鮮人]을 줄여 쓴 것으로 보이는 선 사람들[鮮人]을 선 사람들[仙人]이라고 달리 적었을까요? 사기에 대한 주석을 모은 사기색은, 사기 조선열전의 조선朝鮮에 대한 주석에, 선鮮의 소리 선仙의 소리 같다[I:①-②]고 적었습니다.  둘은 소리가 같은 글자였던 것이니, 선仙이 선鮮에 비해 훨씬 획의 수가 적고 간단며 또한 조선이란 단어가 소리를 적은 것이었기에, 뒤의 글자가 앞의 글자를 대신하여 쓰던 것입니다.


I 사기색은: <① 선鮮의 소리[音]는 ② 선仙이다(=선仙의 소리와 같다). ①鮮音②仙>




그럼 이제 옛 장당-경에 머물던 조선 사람들 가운데 환을 떠났던 사람들의 후손들은 과연 어떻게 환으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전하였는가, 하는 문을 떠올리게 되지요.  답은 고구려의 옛 일을 다루는 글에서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는 더 다루지 않겠습니다.


사실 아사달에 머물던 조선 사람들, 단을 떠났던 사람들의 후손들이 어떻게 단으로 돌아가 그 이야기를 전하였는가, 하는 질문도 남아있지요. 그 답 또한 환을 떠났던 사람들, 그 후손들의 일보다는 앞서 다루겠지만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습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거든요.




다음 글에서는 1장 2편의 주제로 돌아와서 이제 남은 것, 다른 핵심 문자 자료의 한 구절을 마저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여 얻은 이해를 통해 조선과 조선 바깥에 대한 다른 자료들까지 바라보면서 모두 펴보고 이해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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