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만드는 법을 배우다.
운명적인 만남을 믿는 남자 주인공 톰에게 썸머가 다가왔다.
톰 핸슨이 40만 개의 사무실과 9만 1천 개에 달하는 건물과 380만 명의 사람들 중에서 그녀를 찾아낸 것은 이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운명’.
그러나 톰과는 정반대로, 썸머는 인간관계를 염세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저도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사랑’이라는 것은 본 적 없어요. 사랑은 존재하지 않아요. 환상이죠.
둘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상극’. 이 영화는 어떤 하나의 것에 대해 의미를 찾거나 혹은 없으면 의미를 부여하려고까지 시도하는 의미 해독자와 객관적 증거가 아니면 결코 동의하지 못하는 실증주의자 간의 이야기다. 더 나아가 우연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남자와 우연을 무한한 경우의 수 중 선택된경우 1로 생각하는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톰은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 비서로 들어온 썸머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수많은 매력을 가진, 이른바 ‘썸머효과’를 내고 다니는 썸머 역시 톰에게 호감을 느낀다. 썸머와 톰은 서로에게 이끌려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의 썸머와 고지식한 성격의 소유자 톰은 충돌하기 시작한다. 유별난 두주인공을 내세워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연애를 보여줄 것 같던 이 영화는 지극히 보편적인 사랑의 이야기로 귀결되면서 관객들의 사연을 비추는 거울이된다. 마치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떠올리게 만드는 리얼리즘과 로맨티시즘 사이를 줄타는 모습에서 우연, 운명, 사랑 사이의 알고리즘을 추적하려는 야망이 엿보인다. 그리고 이 줄타기의 양 끝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톰과 썸머다.
<500일의 썸머>는 썸머를 만난 1일과 헤어짐의 500일 사이의 시간들을 오가며 진행한다. 이를 통해 영화는 흥미와 긴장을 계속해서 유지하며 동시에 산산이 조각난 사랑의 잔해를 헤집는 톰의 심리를 잘 묘사해낸다. 지반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쌓아올려야 하는 건축가를 포기하고 특정한 날을 콕 집어 광고문구를 쓰는 직업을 가져야만 했던 톰의 직업도 그의 심리상태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마지막에 가서 톰이 다시 건축 일을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의 주제와 이어진다.
영화는 만남과 헤어짐 사이의 일들의 파편 속에서 톰과썸머가 깨닫게 된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썸머를 운명처럼 여기던 톰은 썸머를 놓아주면서 깨닫게 되고, 톰을 그저 흘러가는 사람쯤으로 여기던 썸머는 운명처럼 다가온 다른 사람에 의해 깨닫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썸머는 우연을 운명으로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는 영화 전반에 걸쳐서그녀가 얼마나 적극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며 쭉 증명해왔다. 반대로 톰은 운명을 믿지만 운명의 흐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썸머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항상 먼저 다가가는 것은 썸머였다.
결국 썸머는 후에 톰과 함께 있을 때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사랑의 존재를 다른 누군가를 통해 느끼게 되어 톰의 말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톰은 썸머가 끝내 잡히지 않을 운명이라는 것을 직시하는 순간, 운명은 기적이 아니라 만들어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 영화는 운명을 만드는 능력을가졌지만 운명을 믿지 않던 자와 운명을 믿지만 그것을 만드는 법을 몰랐던 자의 일종의 화합의 이야기다.
영화의 마지막, 썸머는 가고 톰은 어텀(가을)이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오는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다. 여름이 지나면 당연히 가을이 온다. 「500일의 썸머」는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것을 알면서도 여름을 필사적으로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다. 영화가 톰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이유는이 영화는 순전히 톰의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썸머가 가고 어텀이 찾아오면서 톰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이제 톰은 기적을 만드는 법을배웠다.
“전 톰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