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피어날 우리들의 꿈
영국 예술 잡지에서 주최한 영시 공모전, 에세이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본격적으로 임용 고시를 준비하기 2년 전, 대학교 3학년 때부터 2급 번역 자격증을 따서 번역 아르바이트, 국제대회 통역 자원봉사를 시작하고 각종 마케팅, 글쓰기 공모전에서 입상한 이력을 바탕으로 SK 인턴으로 일했다. 통번역가의 꿈을 안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시험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신라호텔 최종면접 중 임원으로부터 “여기 일은 호텔 전공자들에게 맡기고 교사가 되어 제자 양성에 힘쓰시라.“는 말씀을 들으며 또 떨어졌다.
자리를 제안 받은 NGO단체에서 통번역일을 하며 서울 소재 통번역대학원 입학 시험을 준비하기엔 너무 가난했다. (내가 좀 더 끈질기게 공부에 매달리고 가정 형편이 좋았다면 꿈꾸던 법률가, 외교관으로 혹은 국제기관에서 일하며 살 수 있었을까?)
잇달은 실패로 마음은 멍들었지만 해비타트, 유니세프 등 여러 단체에서 주관하는 자원 봉사를 다니며 맑고 푸른 추억들을 만들며 20대의 시린 청춘을 채웠다. 어린이집, 유치원, 공부방, 영어과외, 입시학원, 토익토플 외국어학원에서 일하며 고시 공부를 위한 비용을 모았다. 동시에 스터디에 참여하여 준비한 과제들을 모두 수행해가며 성실히 임했다. 교사가 되고 중1부터 고2까지 담임을 맡아 착실히 일했다. 덕분에 5세부터 18세 연령에 해당하는 교육 경험들이 쌓였다. (은퇴한 후 부산국제영화제, 통영국제음악제에서 통번역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는 작은 버킷 리스트를 품고 있다.)
20대 초중반에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신규 2년차에 산간벽지 소재 학교 출신의 아이들에게 성취의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어 함께 KOICA 공모전을 준비하여 입상했다. 덕분에 아이들이 해외 자원 봉사에 다녀오기도 했다. (여름방학 보충 수업할 선생님이 부족한 학교의 사정으로 나는 수업하느라 가지 못했다. 몇년 후 당시의 나를 안쓰럽게 지켜보셨던 교육과정 부장님이 교무부장님이 되셔 가산점 서류를 챙겨주셔 교육청 주관 해외 연수를 다녀올 수 있었다. 그때 만났던 학교폭력담당 장학사님은 영어교육 연구관님이 되셔 나를 기억하시곤 그때 고생 많았다며 껴안아주셨다.)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이끌어 주고 그들의 성장과 성취를 곁에서 지켜보며 잠들어 있던 꿈이 다시 살아났다. 반 아이들을 서울 소재 예술고, 영재고, 과학고, 외국어고, 서울 소재 대학에 합격시키며 승진 생각이 있는 건 아닌지 동료, 선배 교사들로부터 오해도 받았다.(그랬다면 담임에서 빠져 업무 담당자로 근무하며 연구 대회를 준비했을까? 준비할만큼의 영리함, 관리자로서의 깜냥이 없다.) 아이들은 이미 빛나는 재능과 충만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고 순전히 그들이 내가 경험한 결핍과 좌절을 겪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해준 것이 다다.
“어려운 시간도 지나갔고, 원하는 부모가 되어 살아가고 있으니 이젠 꿈을 위해 노력할 때도 되지 않았니?” 고희를 앞둔 어머니의 묵직한 말씀에 가슴이 뜨끔하다. 잠을 덜 자고 시간을 쪼개어 노력하는 그때의 절실함을 살려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새벽 5시에 일어나 1시까지 공부하고, 2시에 출근하고, 7시에 퇴근하여 8시부터 10시까지 과외 혹은 스터디 하고 11시 넘어 정류장에서 집까지 걸어 다닌 때가 있었다. 그 해엔 시험에 떨어지고 다음 해에 합격했다.)
담임, 여름겨울방학 보충수업, 야간 방과후수업을 하며 30대의 대부분을 보냈다. 20대만큼 절박하게 살진 않았지만 꾸준히 일한 덕분에 취미 생활을 즐기는 여유를 누릴 수 있었다. 남들보다 다소 늦은 40대에 글쓰기 플랫폼에 진입했다. 꿈을 대하는 태만함에 가져올 구실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도전하고 행동하자!!!
삽화가, 그림책 작가라는 여동생의 꿈
예술가로서 자아실현이라는 어머니의 꿈
소설가, 동화작가, 번역가의 삶을 바라는 나의 꿈
그리고 앞으로 피어날 딸의 꿈
모두 모두 이루어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