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둡고 지저분한 그 건물 속 아이들은 모두 같은 국민학교에 다닌다. 아침이면 썰물 빠지듯이 동네 대부분의 아이들이 빠져나간다. 그 시간 1층 시장 상가를 제외하면 건물은 무척이나 조용할지도 모른다. 뚱뚱이 할아버지가 가질 수 있는 평온한 시간인 것이다.
지영이는 출생신고가 1년 늦게 되었다. 엄마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인 건지 아님 다른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정정 신고를 하고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3월 입학식을 못하고 홀로 4월 입학을 했다.
호적 나이로 입학을 해도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키가 큰 아이라 엄마는 조바심이 났다고 했다.
지영이는 입학식 사진이 없다.
오른쪽 앞가슴에 면 수건을 옷핀으로 꽂고, 등에 가방을 메고, 오른손에 신발주머니를 든 채 건방지게 짝다리로 서서 학교 동상 앞에서 인상 쓰며 혼자 찍은 사진 한 장이 전부다.
그렇게 1-1반 63번이 되었다.
한 달 정도 늦은 입학이었지만, 지영이는 두려울 게 없다. 각 학년마다 그리고 각 반마다 우리 동네 아이들이 있으니까.
소풍도 가고, 공부도 하고, 놀기도 그리고 싸우기도 하며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가을 운동회!
교문 앞부터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온 사람들로 붐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펄럭이는 만국기를 보면서
'저걸 어떻게 매달았지' 궁금해한다. 설레는 마음 때문인지 햇살도 더 눈부시고, 발걸음도 가볍다.
평소엔 볼 수 없는 솜사탕 할아버지와 달달한 보릿물에 얼음을 넣어 파는 냉수 아저씨의 모습도 보인다.
운동회는 동네잔치와 같다. 비단 지영이네 동네뿐이 아니다. 삼삼오오 많게는 일곱 집까지도 아는 사람들끼리 뭉쳐서 깔아 놓은 돗자리 위엔 풋내 나는 찐 햇밤, 소금 넣어 짭짤하게 삶은 감자, 사이다, 1층 얼음집에서 산 덩어리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미숫가루, 흰 껍질의 삶은 달걀, 같은 재료이지만 다른 맛인 나는 각 집의 김밥이, 둥글고 3층으로 쌓인 찬합에 담겨 내 것네 것을따지지 않고 푸짐하게 펼쳐진다.
소풍과 운동회가 1년에 2번 김밥을 먹을 수 있는 기회다.
조그만 학교 운동장을 빙 둘러 작은 나무들이 주는 그늘밑과 건물 옆 공간엔 비집고 들어갈 틈 없이 자리 잡고 앉아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 어린 동생들이 한 달여를 공들여 연습한 각 학년의 율동을 구경한다.
구령대에 올라 마이크를 든 교장 선생님의 개회사를 듣고 체육 선생생님의 구령에 맞춰
전교생의 국민체조를 시작으로 1, 2학년의 귀여운 율동, 3, 4학년 오빠들이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 추는 곤봉체조, 같은 학년 언니들이 체육복에 족두리만 쓰고 추는꼬마신랑춤, 5, 6학년 언니들이 한복을 입고 추는 부채춤 또는 한삼춤 그리고 5, 6학년 오빠들의 기마경기를구경하고 있다.
운동회는 항상 추석 즈음이라 강강술래도 빠질 수 없다. 이어서 공 굴리기, 학부모 100미터 달리기가쉴 틈 없이 이어진다. 운동회에 온 모든 사람들은 많은 아이들 중에서 제 자식은 귀신 같이 찾아낸다.
그런 후에는
"저기 경철이 있잖아. 안 보여?"
"저기 저기 희정이 있다. 춤 잘 추네. 무용시켜라"
"선미 언니, 저 끝에 선미 있네"
옆집아이, 앞집아이까지 찾아내느라 여념이 없다.
운동장 가운데서는 춤들이 연속되고, 그 가장자리에서는 각 학년이 100미터 달리기를 한다.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 앞에 선 지영이는 아빠가 새로 사준 '까발로' 운동화가 아까워 달리기 하기가 싫다.
달리는 것도 충분히 싫지만, 운동화에 흙이 묻는 건 더 싫기 때문이다. 달리기를 걷다시피 해서 꼴찌로 들어온다. 꼴찌의 팔뚝엔 숫자 1,2,3 도장이 없다. 숫자 도장이 없으면 나중에 공책 상품도 받지 못하지만, 운동화가 더 소중하다. 청팀, 백팀으로 나누어하는 줄다리기, 운동회의 꽃계주 달리기에서 지영이네 팀이 이기면
공책 한 권은 받을 수 있으니까 그걸로 만족이다.
한 사람당 2개씩 만들어 가야 하는 모래주머니를 던져 높이 매달아 놓은 박을 터트리면
'즐거운 점심시간'이라는 글이 써진 천이 내려온다.
박 터트리기는 저 학년이 했는데, 보기 안타까워서 인지 아니면 답답해서인지 몇몇 어른들이 참다못해 거들어 줄 때가 있다. 박이 터지는 순간 여기저기서 "와" 소리가 터진다.
'이제 먹을 수 있다'라는 함성인 듯하다.
마른 운동장의 모래 먼지와 따가운 햇살도 모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냥 그 속에서 먼지도 먹고, 햇살도 먹고, 김밥도 먹고, 먼 미래가 가질 추억도 먹는 것이다. 더러운 손으로 까서 때국이 흐르는 계란을 짭짤한소금에 찍어 세 입에 먹고, 사이다는 병나발을 불어야 제맛이다. 김밥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걸까?
엄마가 까주는 탱글한 밤알을 한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다른 동네 친구 돗자리로 마실을 가본다.
'다른 아이들은 뭘 싸 왔을까' 궁금해하며.
지영이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동생은 떼어 놓고 싶지만 귀찮음 보다 엄마의 눈초리가 더 무서우니 마지못해 데리고 다닌다. 뻥튀기 한 장을 꼭 쥐고 잘도 쫓아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