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의 오만과 편견을 읽고
지난 주말 나는 친구들과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류적 의견은 이 작품이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단조롭게 다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나아가 그들은 이 작품이 고전 명작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시했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했지만, 한편으로는 <페스트>에 등장하는 파늘루 신부처럼 B급 소설 인가 하는 의구심 때문에 잠에 들지 못하였다. 이틀간의 고민이 동틀 녘 마침내 귀결을 내렸다. 오만과 편견은 고전 명작이다.
우선 고전 명작의 의미를 확실히 해두고 싶다. 명확한 정의가 없기에 보편적인 정의를 종합했다. ‘고전(古典)‘은 ’옛 고‘와 ’법 전‘ 자를 사용한다. 풀어쓰면 ‘예전부터 전해지는 모범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오늘날 사용되는 정의는 조금 더 조건이 붙는다. 인간의 삶에 지침이 될 수 있거나, 당대에 큰 영향력을 미쳤거나, 시대에 따라 재해석될 수 있다는 등의 근거이다.
‘명작’은 사전의 정의 그대로 이름난 훌륭한 작품이다. 종합하면 ‘고전 명작’은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어오는 훌륭한 작품이다. 이때의 ‘훌륭한’은 앞서 말한 삶의 지침이 되어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쳐서, 시대에 따라 재해석되어서 등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다.
이제 이를 바탕으로 오만과 편견을 바라보자. 오만과 편견은 1813년 발행되어, 200년 넘게 대중들에게 읽히고 있는 소설이다. 따라서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훌륭한가?
오만과 편견에 대해 좋지 않은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이 질문을 바탕으로 작품을 비판한다. 첫째로 작품이 너무나 밝고, 희망적이기만 하다는 점. 둘째로 오만과 편견이라는 제목에 걸맞지 않게 내용이 단조롭고, 뻔하다는 점. 마지막으로 전개 과정이 극적이라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그들은 단지 당대 여성의 사랑에 대한 이상향을 그렸을 뿐이라고 작품을 평가한다. 즉 훌륭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제목과 관련하여 작품을 살펴보면, 작품 속에서는 타인을 오만하다고 믿는 편견과 그 편견을 굳건히 믿는 스스로의 오만이 드러나 있다. 대표적으로 다아시를 바라보는 엘리자베스를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다아시와 말을 나누고, 편지를 받고,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오해와 선입견을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결국 그 속에서 다아시의 진면목을 발견하며 둘은 결혼에 이른다. 이러한 중심흐름은 디즈니처럼 희망찬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조금 더 엘리자베스의 시선에 동화된다면 보다 많은 것이 보인다.
샬럿과 콜린스의 결혼을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던, 엘리자베스의 편견과 다르게 그들은 각자의 목적에 부합하는 결혼 생활을 하며 행복했다. 다아시와 위컴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된 엘리자베스는 아직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어머니가 그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며 불편함과 분노를 느낀다. 이것은 엘리자베스의 오만이 드러나는 대목으로 엘리자베스는 다아시와의 관계에서는 서로의 오만과 편견을 지워가는 것에 성공했지만,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들에겐 아직도 선입견과 오만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사소한 장면부터 전체 흐름까지 오만과 편견이라는 감정을 매우 잘 드러내고 있다. 또한 작품의 첫 제목이 첫인상이었지만 오만이라는 단어가 추가된 것은 오만과 편견이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임도 한 몫할 것이다.
오만과 편견이라는 인간의 감정뿐만 아니라 당대의 사랑에 대한 관념을 잘 엿볼 수 있는데, 여성은 결혼을 통한 소유물로 여겨지며 결혼을 통해 신분을 상승하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믿음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다아시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은 상류층 도련님과 평범한 중산층 여성의 결혼으로써 완전히 깨져버렸다.
다아시의 첫 고백 장면에서 그는 당연히 엘리자베스가 청혼을 받을 것이라 여긴다. 이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한 오만이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이를 거절한다. 이를 바탕으로 그녀는 주체적인 사랑을 원하는 계몽된 여성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둘 간의 오해가 해소되고 다아시가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의 오만을 깨닫고, 서로 소통하는 것과 보이지 않는 도움을 주는 것을 통해 사랑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진정한 사랑은 신분을 초월할 수 있다는 점은 현실을 이겨낸 이상의 실현이라는 의의를 가지기도 한다.
다시 돌아와서 작품을 평가해보자. 이 작품은 우리에게 인간이라면 느끼는 오만과 편견에 대해 드러내며, 서로를 이해하고 열린 자세로 상대와 소통하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사랑은 전유물이 아니며, 현실의 제약마저 뛰어넘을 수 있다는 당대를 넘어선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일상 속 우리의 태도를 성찰하며,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이었나를 고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기에 삶에 대한 하나의 태도를 충분히 보여준 작품이다.
더불어 당대 여성에 대해 억압적이었던 사회 속에서 여성이 자립할 수 있는 도화선이 되었으며, 여성의 주체적인 사랑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문을 여는 역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학벌, 직업, 나이, 가정 형편, 재산 등을 고려하며 진정한 사랑보다는 조건에 맞는 안정된 삶을 추구하고 있다. 이 작품이 쓰일 때는 현실적 여건에 제약을 받는 것은 여성이었다면, 이제는 남녀 가릴 것 없이 모두가 현실과 물질적 제약 속에서 주체적인 사랑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으로 대상이 확장된다. 그리고 우리는 신분제가 없음에도 사랑과 결혼에 관한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내지 않았나 하는 깊은 고민에 잠기게 된다.
오만과 편견은 단순한 사랑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깊게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찾아오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이 감정에 대응하는 인물의 복잡한 심리가 섬세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사랑을 둘러싼 세계와 사랑을 주체적으로 실현하는 자아의 갈등은 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아와 세계의 갈등을 담고 있었음을 알았으면 한다. 이제는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표면적인 비판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이 작품이 너무나 뻔하고 단순해 보인다면, 이것이 사랑 소설의 밑바탕임을, 그리고 이 이야기가 당대에 굉장히 파격적이고, 크나큰 의의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만큼 많이 차용되어 이제야 진부해졌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